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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Oct 01. 2019

디스토피아

어제 월요일까지가 휴가였다.

비오는 제주도에서 서울로 돌아오니 파란 하늘이 맑고 너무 좋았다. 오전까지 푹 쉬다가 오후 늦게는 휴가 마지막이 아까워서 하늘공원에 가기로 했다. 가을 날씨에 어울리는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사람 없을 때 넓은 억새밭을 보니 기분이 좋았는데 공원 끝 울타리 쪽에 서니 한강 너머 목동과 여의도가 보이지가 않았다.

이게 왠일이지. 불그스레하니 뿌연 하늘은 아침에 보던 파란 하늘이 아니었다. 좀 이상했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이 좋은 계절에 미세먼지가 뒤덮었을거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눈과 머리가 아프고 이상하게 피로가 심했다. 미세먼지 많이 쐬었을 때의 증상이랑 똑같았다. 아 그게 아까 미세먼지였구나... 조금씩 알아차리고는 집에 와서 청정기를 틀어보았다. 내 눈을 의심했다. 미세먼지 수치가 400이었다. 순간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이제는 비가 쏟아지던 제주도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가장 날씨좋은 계절 이 가을에 미세먼지가 400이라니...

그렇게 어젯밤에는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맥을 못추다가 11시도 안 되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날씨도 컨디션도. 계속 어제와 비슷했다.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은 또 회사에 출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똑같이 일 없는 상태에서 유령처럼 자리 지키고 앉아있으려니 금세 컨디션이 안 좋아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영향이 없진 않았겠지만)

점심에 오랜만에 밥을 먹고 고수부지까지 걸어나갔는데 하늘은 파란 색이 아니었다. 한강 건너편을 보니 풍경은 그렇게 선명하지 않았다. 묘하게 뜨거운 날씨에 미세먼지는 다 걷히지 않은 것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저녁에는 다시 어제와 같은 증상으로 고생했다. 소화도 안되고 눈과 머리의 피로 때문에 저녁 내내 헤롱헤롱 누워있었다. 도저히 속이 안 좋아서 일어나 운동을 좀 하다가 뒤늦게 청정기를 틀었다. 수치는 다시 300을 넘고 있었다. 

나도 호흡기 쪽이 건강한 편이 아니라 비염이니 천식이니 고생하는 데다가 평소엔 폐활량이 크지 않아선지 밀폐된 공간에 잘 있지 못한다. 실내보다는 항상 테라스에 앉는 편이고 야외로 나가는 것이 좋다. 아마도 본능적으로 산소를 확보하기 위해서인거 같은데. 그럼 나같은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얼마전 국민은행 박원갑 수석위원 강의를 들었었는데 향후의 트렌드 중 하나로 미세먼지 대기오염을 꼽았다. 사람들이 로망을 가지는 전원주택, 단독주택은 점차 인기가 사라질 것이라고. 미세먼지가 심한 날 결국 공기 질이 가장 좋은 곳은 잠실 롯데타워 같은 거대한 콘크리트 건축물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국 공조시스템이 잘 설치된 인공 구조물 속으로 들어가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의 조언은 집을 마련할 때 시스템이 잘 갖춰진 신축 아파트를 사라는 것이었으나 나는 우리나라, 혹은 이 지구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고 이상주의와 유토피아를 그리는 맘이 강한 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미 내가 쇠퇴기에 태어나 아래를 향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긍정적인 남편은 이렇게만은 가지 않을 거라고, 전기차든 친환경 에너지든 무언가가 바뀔 거라고 하지만 도저히 밝게만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약한 사람부터 먼저 넘어지기 때문이겠지.

어제 오늘의 우울함은 회사와 나의 인생 고민인줄 알았는데 역시 가장 치명적인 것은 나의 몸이었다.

도망갈 수 없는 대기오염, 미세먼지의 습격에 나는 무력하게 넘어져버렸다.

사람 때문에 음식 때문에 외국 이민은 도저히 못 간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생존을 위해 이민 가는 날이 오게 될까봐 나는 몹시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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