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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Feb 06. 2022

에스프레소 바

작고 세련된 것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머무른 지가 이제 두 달이 되어간다.

답답함과 우울감이 너무 심해지던 차에 오늘은 산책 삼아 후암동에 가보고 싶었던 에스프레소 바에 들러보았다. 남산을 통해서 걸어가는 후암동 산책은 가는 길이 아기자기해서 기분이 좋다.

산비탈에 작은 연립주택들과 시장 등이 꽉 들어찬 그야말로 옛날 분위기의 동네인데 이곳도 최근 그 분위기를 살려서 멋진 상점들이 들어오는 것 같다. 남산 아래라는 입지가 워낙 좋고 서울 전체 지도상으로도 위치는 나무랄 데 없는 곳이다. 아늑한 느낌의 동네라 이런 곳에 살면 참 좋겠다 싶은데 문제는 도시 개발이 그렇게 현명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개발 전이라 단층 건물의 아늑한 동네 분위기가 살아 있지만 이걸 또 깨끗하게 개발하는 경우 무지막지한 신축 아파트 단지가 빼곡하게 들어설 가능성이 매우 높을 테니.

오늘 갔던 곳은 오르소 에스프레소 바. 

참 신기하다. 언제부턴지 로스터리 샵 등 전문 커피집을 넘어서 에스프레소만 전문으로 파는 바까지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했다. 음식료 부문만 극단적으로 확장되는 느낌이다. 우리나라는 무엇이든 유행 타는 것과 쏠림현상이 심한데 요새 트렌드는 단연 의식주와 관련한 작고 세련된 소비들. 조금씩 유럽, 영미의 아이템들이 타고 들어오는가 싶더니 특히 요식업계는 최근 몇 년 사이 빅뱅이 일어난 것처럼 가지수가 많아졌다. 자영업 경쟁도 만만치 않겠단 생각이...

암튼 가까이 걸어갈 만한 곳에 숨어있는 에스프레소 바라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즐겁게 걸어갔다. 사실 커피가 속에 아주 편하지는 않아서, 그리고 카페인 민감자이기도 하여 그렇게 편하게 마시지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두통 환자라면 반드시 카페인은 끊어보라는 여러 조언 때문에 요즘은 더욱 커피를 멀리하고 살았다. 두통 관련해서 주위에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동기 오빠 한 명이 경험이 많아 상담도 하고 그랬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오빠가 항상 카페에 가면 에스프레소를 마시곤 했다. 여의도에 카페가 많아졌다곤 해도 아직 에스프레소는 흔히 마시는 메뉴는 아니다. 게다가 평일 점심에 여의도에서는 더욱. 그게 카페인 때문이었는지 두통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오빠의 특이한 주문을 몇 번 보면서 나도 한번? 이런 생각만 어렴풋이 하곤 했었다. 어쨌든 카페인 함량이 제일 적은 건 에스프레소가 맞고 원체 마시는 양 자체가 적은 나에겐 이래저래 괜찮은 메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에스프레소가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겠다. 많이 접하지 않아서 그렇겠지. 어렴풋한 기억은 옛날 밀라노 교환학생 시절에 골목마다 자리잡은 카페와 바에 수많은 사람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조그만 잔에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수다 떨었던 기억이다. 그때는 더욱이 어려서 커피의 천국에 살면서 정작 커피를 즐기지 못했다. 테이블마다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가 주위에 항상 잔으로 쌓여있던 기억만 친숙하게 남았을 뿐. 그치만 그 작은 양을 마시는걸 보면 아무래도 이건 죽치고 앉아 수다 떠는 용도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역시 효과적인 카페인 수혈용 음료인걸까. 

오르소 에스프레소 바는 후암동 골목 안쪽에 자리잡은 작은 오렌지색 바였다. 좌석은 모두 바와 스툴로 이루어져 있고 한 10자리 정도? 그 조용하고 후미진 골목이었지만 역시 가게는 만석이었다. 사람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들어오는 바람에 작은 가게 안 사장님과 직원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가게 인테리어며 메뉴 등 모든 것이 참 좋았는데 딱 하나, 한가로움이라는 제일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었다. 아쉽게도.

에스프레소 메뉴는 모두 2,000원대로 가격이 부담이 없었고 네 가지 정도 되는 메뉴를 다 마셔보고 싶었지만 카페인을 생각해서 콘파나 한 잔을 일단 시켜보았다. 입을 헹궈주는 작은 탄산수와 함께 꼬마 에스프레소 잔에 휘핑크림을 얹은 에스프레소가 나왔다. 섞어 드시라는 말에 잘 섞어서 먹어 보았는데 아아. 탄성이...

맛있더라. 이름이 뭐든 진하든 연하든 일단 맛이 첫번째인데 정말 맛있었다. 진하고 고소한 커피에 역시 진하고 고소한 크림이 가득 섞인 그 맛. 카페인이고 뭐고 너무 맛있어서 애써 아껴 마셨다. 한 입에 툭 털어넣기에는 아까운 음료였다. 커피를 잘 마시는 인종이었다면 아마 네 가지 모두 차례로 시켜서 맛 봤을듯 싶다. 

바쁘게 들어와 주문하는 사람들, 커피를 만들어 내놓는 직원들. 활기찬 분위기가 참 좋았다. 바에 앉아서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그렇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사람이 많고 여유가 없었다. 나라도 얼른 일어나서 자리를 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어서 난 금방 일어났다. 

믹스커피에서 아메리카노, 그리고 라떼와 카푸치노. 거기에 다양한 산지와 이름이 붙은 원두를 골라 내린 드립커피. 커피의 스펙트럼도 참으로 다양하다. 어렴풋이 그 맛이 차이도 느낄만하다. 그런데 이 엑기스만 쭉 뽑아내린 에스프레소라는게 처음 경험했지만 너무 진하고 맛있었다. 양이 적으니 부담없이 더 좋고. 작지만 강하다는 말이 딱 어울린달까.

대충 쳐보니 이미 유명한 에스프레소 바들이 서울 전역에 검색되었다. 아. 그러나 이렇게 후미진 골목의 바조차도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거 같으니... 주요 상업지구에 위치한 다른 곳들은 얼마나 박이 터질까. 메뉴도 분위기도 다 좋은데 안타깝게도 마지막 완성요소인 인구밀도에서 다들 탈락이다.

유달리 공기가 맑고 찼던 오늘, 맘 먹고 찾아간 오르소 바는 정말 좋았다. 그러나 골목골목, 마주쳐 지나가는 모든 카페마다 가득 들어찬 사람들을 보면서 숨이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빅뱅 후의 별들처럼 수없이 생기는 카페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이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 결국 대한민국은 서울 공화국이 되고 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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