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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Oct 09. 2019

가을 휴일

10월의 휴일인 개천절과 한글날은 참 좋은 계절에 있는 휴일이다.

매년 가을이면 날씨와 계절을 예찬하는 말을 꼭 하게 되는 것 같다. 각 계절의 묘미가 있지만 알맞은 날씨에 바깥 활동하기도 좋고 봄처럼 어수선하지도 않게 차분한 가을은 참 좋은 계절이다. 최근에는 미세먼지가 급격하게 심해지고 나니 더욱 가을의 날씨가 빛이 난다. (물론 이번 가을엔 미세먼지가 꽤 높은 날들이 좀 있어서 가슴이 철렁하기도 했다. 이러다 이민을 가야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중 수요일에 딱 끼어 있는 한글날 휴일은 시작 전부터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결혼 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집안일 때문에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그저 즐기기에는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무엇보다 날 짓누르는 것은 옷 관리이다. 결혼하고 나서 가장 힘든 일은 단연 옷 관리인 것 같다. 우리나라가 대체 왜 사계절인 것인지. 아빠와 나의 산더미같은 옷들을 보고 있으면 정신병이 올 거 같다고 했던 엄마의 심정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마주하고 있다. 일년에 4번은 정말 너무 자주인데 이때마다 옷장을 뒤집어 엎고 옷 종류별로 나누어 세탁하고 말리고 차곡차곡 개어 옷장 및 서랍을 리뉴얼 해야하니.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말로만 외쳐댔던 미니멀리즘이 바로 생활화 되기 시작했다. 결혼 이후 나는 옷을 계속 버리고만 있다. 이제 곧 있으면 계절 별로 옷 서너벌로 나게 될 때가 머지 않았다. 팔색조 기질인 나도 현실의 장벽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엄마와 함께 했던 황금기가 이제 끝났으니 나도 현실에 적응해야지.

그렇지만 어찌됐든 직장에 입는 정장과 평상시에 입는 옷들만 해도 종류는 이미 많고 관리법도 다 다르다.

게다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기후변화까지 겹쳐서 난 대대적인 옷정리를 해야한다는 스트레스를 이미 2-3주전부터 맘속에 꿍쳐두고 있었다. 

지난 주말 태풍이 지나가고 기온은 곤두박질쳤다. 반소매 옷들을 언제 다 모아서 세탁할 것인지, 드라이는 새로운 어플서비스에 맡겨볼 것인지, 물빨래는 어디까지 내가 할 것인지 고민하던 것들이 이제 실행단계로 다가왔다. 그게 한글날이다. 주중 주말 시간이 많아서 권태에 허우적 댈 때는 언제고 갑자기 집안일을 해야 할 때가 오니 양가도 찾아뵈어야 하고 국정감사 대기 출근에 뭔가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한글날이었다. 기분 좋고 날씨 좋은 이 한글날 휴일을 앞두고 나는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날씨가 어찌나 청명하고 맑고 시원하던지. 오늘은 가을 날씨 중 가장 좋은 날이었다. 

너무 많은, 혹은 중대한 일을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과도하게 하다 보면 정작 해야 할 때가 왔을 때 모든 걸 놓고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오늘 내가 딱 그랬다. 너무 좋은 날씨와의 대비 때문이었을까. 그냥 현재를 즐기고 싶다는 이상한 마음과 함께 오전에 편안하게 노닥거리다가 점심은 갑작스럽게 연남동 툭툭누들타이로 정했다. 이곳은 동진시장 옆에 있던 시절부터 언제든 웨이팅이 길었던 곳. 지금 이곳으로 옮기고 한동안은 갔다가 웨이팅 인파에 질려서 다시 돌아온 적도 몇번 있었던 곳. 근데 왜 난 할일이 쌓인 오늘 여길 갔을까. 도피심리였을까.

신난 남편은 노트북까지 다 챙겨서 길을 나섰다. 맛있는 것도 먹고 그 다음에는 카페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며.

차를 가지고 나선 거 자체가 실수였을만큼 날씨는 너무나 좋았다. 오늘은 어디든 종일 걸어다니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툭툭 앞에 그렇게 맛있는 카페들이 많았는지 난 몰랐다. 오늘 오랜만에 가보니 스탬프 커피, 카페 레이어드, 콩카페... 옆집 풍경들도 눈을 사로잡았다. 웨이팅 8팀이 양호하다 생각하며 애피타이저로 스탬프 커피에서 빵을 하나 사먹었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ㅠ 햇빛은 여름처럼 따갑고 찬란한데 공기는 쌀쌀한게 정말 환상적이었다. 여행을 갈 때 항상 이런 날씨를 꿈꾸면서 간다.

2층 테라스 자리는 꼭 외국에 온것처럼 여유있고 좋았다. 햇빛을 가득 받으면서 맛있게 밥을 먹고 나왔다. 그냥 할일은 저 하늘 너머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이미 부른 배 때문에 굳이 디저트를 먹을 생각은 없고 조용히 공부하기 좋은 퀜치커피로 가자 하면서 나왔는데 우리 차 바로 앞에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내가 좋아하는 팀장님이었다! 따님 둘과 함께 골목 앞에 서 계셨는데 이 휴일에 연남동 골목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얼굴이라 반갑고도 웃음이 터져나왔다. 너무 의외라서 그런지 난 말도 제대로 못건네고 인사만 급히 하고 차에 올라탔다. 날씨가 좋으면 이런 것일까? 이런 만남도 좋고 그저 기분이 좋았다. 꼭 영화 속의 하루 같았다.

지금 이 글은 퀜치커피에서 쓰고 있다.

여러번 왔지만 오늘처럼 퀜치커피에 사람이 꽉 찬 것은 처음이다. 정말 모든 자리가 꽉 차있다.

이렇게 날씨 좋은 날 골목 안 숨어있는 이 곳에 사람이 많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나는 충전도 안한 채 노트북을 들고 왔다. 이제 충전 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곧 노트북을 꺼야겠다.

빨래와 옷 정리는 일단 뒤로 하고 오늘의 날씨를 만끽하기 위해 올레길은 못가도 남산이라도 가서 걸어야겠다.

정말이지 난 가을이 좋다. 일년 내내 이런 날씨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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