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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Oct 29. 2019

애호박찌개

한 달 정도 심한 의욕 저하로 매 끼니 사먹기만 했다. 음식에 민감한 나인데도 집에서 손 하나 까딱하기가 싫어서인지 계속 외식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배도 크게 고프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식욕도, 요리에 대한 애정도 다시 되살아났다. 

정말 오래간만에 오늘 저녁에 요리할 메뉴는 애호박찌개. 레시피를 한번 확인하기 위해 네이버에 검색하자 연관검색어 1위에 광주 애호박찌개가 떴다. 그렇지. 내가 애호박찌개를 처음 알게 된 것도 광주에서였다. 

진짜 애호박찌개가 광주의 음식인가 하기에는 매우 평범하고 소박한 메뉴라서 진위를 알 수가 없다. 

돼지고기를 살살 볶다가 육수를 붓고 고추장과 고춧가루, 애호박과 각종 채소를 넣고 팔팔 끓여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는 매우 보편적이고도 맛있는 찌개다. 다만, 서울에선 그냥 호박을 숭덩숭덩 썰어서 고추장찌개라고 먹었던거 같은데 광주에서 먹었던 애호박찌개는 잘게 썬 호박채를 풍성하게 넣어 끓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찌개와 함께 나오는 다양한 반찬이 좋았던, 집밥의 대명사 같았던 메뉴.

난 회사 발령 때문에 광주를 처음 가게 되었는데 마침 함께 계셨던 지점장님이 그쪽에 연고가 있으시고 또한 음식과 삶에 풍류가 있으셨던 분이라 예상치도 않았던 남도 식생활의 진미를 체험하고 왔다. 동네마다 다양한 식당들을 갔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 중 하나가 시골농장이라는 아주 평범한 식당이었다.

농성역 근처 골목에 위치한 시골농장은 사장님과 이모님 두 분이 운영하는 평범한 집밥 식당으로 매운 등갈비찜, 닭도리탕, 갈치조림, 그밖에 애호박찌개, 된장찌개를 포함한 일반 백반집 단품메뉴를 모두 하는 곳이다. 직원 한분의 추천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가 우리는 여러 메뉴가 다 수준 이상으로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보통 메뉴가 많으면 맛있는 메뉴는 없기가 쉬운데 이곳은 그 예측을 깨버린 곳이었고 기본으로 깔리는 반찬들도 하나같이 깔끔하고 맛이 좋았다. 사장님 손맛이 참 야무지다는 생각을 했었다.

대표 메뉴 뽑기가 어려운 이 집에서도 지점장님은 특히 애호박찌개를 자주 드셨고 나도 애호박찌개하면 이곳이 이어서 기억이 난다. 남도지만 간도 안 세고 구수한 맛이 딱 집에서 엄마가 차려주는 상 받는 느낌.

실제로 다시 본점 갈때 이사 때문에 내려온 엄마도 여기 데려가서 밥 먹었었고 2년 지점 생활 동안 사람들하고 가장 많이 갔던 식당은 이곳이었다. 사장님 아직 잘 계시려나? 광주에 갈 일이 생기면 꼭 다시 가고 싶은 식당이다.

그래서 그 기억을 살려 오늘 저녁엔 애호박찌개를 끓여보려고 한다. 내가 하면 왠지 간이 좀 칼칼할테니 거기에 맞춰 밥은 콩나물 밥으로. 더울 때는 옷도 적당히, 음식도 적게 그냥 누워있게만 되는데 역시 날씨가 추워지면 다양한 거리들이 생긴다. 의욕이 좀 살아나는 거 같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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