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누크 Nov 11. 2019

엄마의 김치

계속 몸이 안 좋고 입맛이 없어서 사먹다가 집에서 해먹다가 대충 때우다가 그렇게 지냈다.

사실 직장인 주부들은 반찬을 종종 사먹기도 한다. 왠만한 반찬은 그냥 해먹어도 되는데 반찬 중의 최고봉은 역시 김치와 장아찌 종류.

김장 직전인 지금이 냉장고 김치칸이 가장 비는 시기다. 결혼 후 제일 맛들여버린 농라 카페에서 온갖 식자재를 사다가 먹었으나 맘에 드는 김치 판매자는 찾지 못했다. 나름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구매하는 판매자의 경우에는 크게 실패하는 법이 없는데 김치는 참 어려웠다. 요컨대 이건 입맛의 문제여서, 다른 사람들이 맛있다고 사먹는다고 해도 그게 내 입에 맞으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인기가 폭발하는 판매자들 김치를 두 군데 정도 주문해봤지만 역시 어딘가 모르게 아쉬운 느낌이었다.

입맛이 떨어지자 신선한 새 김치가 먹고 싶어 젓갈을 많이 안 쓰고 시원하게 담는다는 충청도 판매자 김치를 주문해보았다. 겉절이와 알타리 1kg씩. 택배가 도착하여 봉지를 열고 반찬통에 옮겨담는데 어쩐지 때깔이 좀 낯설다. 끈적해보이는 양념이 그리 맛있어보이지 않았고 냄새도 썩 좋지 않았다. 저녁을 차려 바로 맛을 보았더니 역시 첫인상은 틀리지 않았다. 조금씩 주문한 것이지만 그래도 한 통씩인데 난 두 번 먹을 자신이 나지 않았다.

물론 정성들여 담은 김치라고 생각하지만 이상하게 속에서 구역질이 났다. 비위가 상한 것이다. 김치에서 나는 맛과 냄새가 영 거슬렸다. 이전 다른 유명 판매자에게 샀던 김치도 정성스럽게 재료를 듬뿍 넣어 담은 작품이었으나 묘하게 뒷맛이 나와 맞지 않았다. 

워낙 한식과 김치를 좋아해서 왠만한 식당에서도 다 잘 먹는 나인데... 지금은 비위가 약해져 있는 상태라 더 유난인가보다 했지만 빈 냉장고처럼 왠지 내 속이 휑해지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남은 엄마의 묵은 김장김치 한 쪽, 그리고 아예 담백한 마지막 동치미만 두고 나는 계속 버티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엄마가 결국 팔을 걷어붙였다. 예전 오래 살았던 동네로 다시 돌아가자 여기저기 아는 집들에서 좋은 채소가 많이 들어온다면서 엄마는 내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열무 물김치에 초롱무 김치를 한 통씩 가득 담아 주말에 나에게 들려주었다. 중간 지점에서 만나 김치통을 건네 받고 30분 가량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너무 좋으면서 새삼 친정과 엄마와 멀어졌다는 것이 느껴지면서 어찌나 만감이 교차하던지. 같은 서울이지만 이제는 너무나 멀어져버린 내가 최고로 치던 엄마의 밥상.

오늘 운동하고 집에 와서 얼려놓은 밥 조금을 물 넣고 살짝 끓여서 엄마가 준 초롱무 김치랑 먹었다.

동네 친한 아주머니가 평창에서 갓 뽑아와서 그날로 담았다는 초롱무 김치는 눈물이 찔끔 나올만큼 맛이 있었다. 신선하고 맛있는 재료도 재료지만 무엇보다 그립고 익숙했던 딱 엄마 김치 그 맛이었다. 요네하라 마리의 에세이에 자주 등장하는 '주먹밥과 우메보시의 힘'처럼 난 따끈한 눌은 밥에 엄마의 초롱무 김치를 먹고 몇 주간 힘들고 휑했던 속을 싹 달랠 수 있었다. 홍고추를 갈아 만든 엄마의 역작, 열무김치도 지금 냉장고에서 잘 익어가고 있다. 

그 어떤 보약보다 천금보다 소중한 엄마의 김치-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원초적인 힘은 바로 이런 데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예전 가족들과 낄낄거리며 먹었던 야식이 그리워지는 밤이다.

작가의 이전글 허리, 매트리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