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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Jun 11. 2020

토마토주스

토마토는 질리지 않는 과일이다. 과일이면서 채소이기도 하다는데 그저 달지만도 않으면서 짭짤한 특유의 맛은 음식과 디저트에 모두 어울리는 독특한 과일이다. 달지 않아서인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기도 하다.

그 짭짤한 듯한 진한 맛을 살린 대저토마토는 봄 한철에 나온다. 처음에 먹어보고 너무 맛있어서 계속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도 여기저기서 사다가 한참을 잘 먹었는데 막판에 박스로 큰 맘 먹고 주문을 했더니 영 실하지 않은 게 왔다. 끝물이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좀 지나서 먹어보니 이건 짭짤이가 아니라 그냥 잘 익은 찰토마토다. 맛만 심심한게 아니라 금방 물러지기까지 했다. 잘못 샀구나, 싶어 고민하다가 문득 갈아서 먹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강판을 꺼냈다. 신혼살림 이거저거 살때 엄마가 챙겨줬었다. 일제 플라스틱 강판이다. 일본 물건답게 아담한 크기에 가볍고 성능이 좋다. 나와 동생이 토마토를 좋아하니 엄마는 사철 내내 토마토를 사다가 우리를 먹였다. 좋은 토마토는 잘라서 먹지만 그것보다 기억에 남는건 엄마가 갈아주는 토마토주스였다. 우리가 어릴때부터 엄마는 강판에 토마토를 쓱쓱 갈아서 꿀을 타서 주셨다. 원래도 맛있는 토마토지만 그렇게 갈아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우리는 먹고 또 먹었다. 더운 여름엔 아예 떨이로 파는 토마토를 박스로 들여다가 큰 통에 듬뿍 갈아 냉장고에 넣어놓고 먹고 싶을 때마다 원없이 가져다 마셨다. 

토마토가 라이코펜이니 뭐니 몸에 그렇게 좋다는 건 나중에 알았고 엄마는 너희가 먹은 그 많은 토마토가 그래도 몸에 다 쌓여서 좋을거다, 했었다. 보통은 편하게 블렌더에 넣고 갈아버리는데 그보다는 번거로워도 강판에 가는 것이 영양소 파괴가 덜하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물론 엄마의 토마토주스는 그 모든 걸 알고 만들어 먹은게 아니었다. 자연의 그 맛이 좋으니까,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토마토를 사온 거였고 기계보다는 손을 움직여서 쓱싹 만드는 엄마의 방식대로 만든 주스였다. 일부러 의식을 가지고 대단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엄마는 원래 그렇게 자연과 가깝게 푸르고 근면한 사람이었다. 필요한 거 외에는 물건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소비가 적으니 나오는 쓰레기도 많지 않았다. 매일 몸을 자주 움직이며 일하며 지냈다. 엄마는 식물과 친하고 미소가 밝아 우리를 다 키운 후에도 새댁이라는 별명을 종종 듣곤 했다.

요즘 환경오염이 심해지고 기후변화나 질병이 가까이 다가오자 친환경, 생태친화적인 운동과 물결이 여기저기서 많이 보인다. 최근 읽은 법정스님의 독서목록에 오른 책들도 대부분 자연과 공생하는 수도자들이 쓴 책이었다. 그런 걸 볼 때마다 엄마가 생각난다.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내가 자라며 봐온 엄마의 생활방식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환경친화적이었는데.

엄마가 쓰던 것과 같은 강판에 토마토를 득득 갈았다. 무르익은 토마토들은 쉽게 잘 갈렸다. 대여섯개의 토마토를 갈자 한 컵의 주스가 나왔다. 꿀을 타서 먹자 옛날의 그리운 맛 그대로였다. 다음엔 엄마한테 토마토주스를 직접 갈아드려야겠다. 여름 아침이 참 서늘하고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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