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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Jun 22. 2020

남대문 꽃시장

집에서 남대문 시장을 걸어서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은 큰 매력 중 하나다.

예전에는 남대문 시장에 가면 핵미사일 빼고 다 구할 수 있다는 말도 들었었는데 정작 가서 사려고 보면 딱히 집을만한 물건은 없었다. 가끔씩 온누리상품권이 생길 때마다 시장에 한 번 가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미뤄지고 또 미뤄지는 형국이었다. 

동네 카페에 들어가면 가끔씩 엄마들이 꽃시장에서 꽃을 사왔다고 사진을 올렸다. 안 그래도 올해 코로나 때문에 가장 피해가 큰 업종 중 하나가 화훼농가라고 하여 회사에서도 일부 꽃을 구입하고 나도 응원하는 마음에서 동네 꽃집에 가서 몇 번 꽃을 샀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엄마의 영향으로 생일 때마다 꽃은 항상 사는 편이었었다. 동네 꽃집이라고 해도 조금은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남대문 꽃시장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은 계속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주말에 마음을 먹고 다녀왔다. 도매시장이기 때문에 주중엔 오후 3시쯤 문을 닫고 토요일에만 4시까지 영업을 하기 때문에 직장 다니는 사람들에겐 토요일 오전만이 유일한 기회다.

어느새 불볕처럼 뜨거워진 날씨를 뚫고 남대문 시장으로 향했다. 예전 만리동 고개길에서 서울역을 위로 하여 회현역으로 이어지던 고가도로를 개보수하여 지금은 사람들이 다니는 하늘정원길처럼 만들어 놓았다. 서울로라는 이름의 이 고가산책로는 이 동네의 명물이 되었다. 계절마다 수목을 바꾸고 이런 저런 이벤트 장소도 만들어 놓아 꾸준히 사람들이 찾는다. 무엇보다 만리동, 중림동 쪽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서울역을 가로질러 시내로 걸어갈 수 있는 통로가 되어 무척 편리한 길이다.

뜨거운 더위 속에 서울로를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문득 서울역 앞쪽의 대로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더워지자 서울역 지하에 기거하던 노숙자들이 모두 위로 올라와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 근처 약간의 그늘진 곳들 위주로 길게 행렬을 지어 앉아있었다. 깔끔하게 꾸며진 하늘정원길 위로는 깔끔하게 단장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지나다니는데 그 바로 밑으로는 가장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줄지어 앉은 모습은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폭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스크를 끼니 금세 습기가 차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시장 골목은 인산인해였다. 대도상가 3층까지 올라가니 그제서야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꽃시장은 파장을 앞두고 있어 조금은 한산했다. 더운 날씨 탓인지 곧 정리할 시간이어서인지 상인들도 별 기운이 없었다. 꽃을 보고 고민을 해도 무얼 찾느냐는 응대조차 없었다. 아무래도 도매시장에서의 소매손님은 그렇게까지 반갑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싸게 사는 것은 됐고 정가에 싱싱한 꽃이나 사가면 다행인 것 같아 어느 한 집에서 맘에 드는 색깔의 장미 두 묶음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 잔꽃다발을 하나 골랐다. 시큰둥한 표정의 주인 아주머니는 내가 장미에 대해 물어보자 그제서야 웃으며 모르면 물어보고 사야지, 하면서 이게 좋은 꽃이라고 가리키며 꽃들을 신문지에 싸주었다. 확실히 동네 꽃집보다 양은 많았다. 더위에 걸어와서인지 지치고 힘들었지만 싱싱한 장미 다발을 안자 즐거워졌다. 돌아가는 길에는 버스를 타려고 했었지만 그냥 다시 걸어가기로 했다. 

꽃다발을 아이처럼 소중하게 안고 걸어가는데 새삼 요즘은 그 누구에게도 여유도 웃음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시장이든 동네의 가게든. 잘 아는 사람은 악착스럽게 흥정해서 물건을 가져가는 것이고 모르는 사람은 기대도 하지 말고 정가에 물건이나 제대로 된 걸 고르면 다행이고. 웃음도 에누리도 따뜻한 정으로 만들어지는 단골도 요즘은 잘 없다. 먹고 사는 것이 너무나 다들 팍팍하니까.

다시 노숙자들로 가득한 서울역 앞을 지나가니 꽃을 들고 그 위를 걸어가는 나는 마치 왕족과 같았다. 세상이 팍팍하고 건조하게 변해가는 가운데 그나마 변하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꽃과 그 향기 뿐인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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