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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Sep 27. 2019

제주여행 : 1일차

그렇게 나는 비오는 제주를 향해 떠났다.

처음에는 생각없이 3일 가는거 꽉 채우고 오자는 심정으로 9시 비행기를 끊었는데 닥치고 보니 뭐하러 이렇게 이른 비행기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아침형인 남편마저도 저녁마다 잡힌 약속 때문인지 아침에 일어나질 못하는데. 게다가 이제 비가 오고 보니 제주에 도착해서 점심시간까지 어딜 돌아다니며 구경하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냥 10시에서 11시 비행기 정도 타고 여유있게 가서 도착해서 점심먹으면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겨우 자리에서 기어 일어나서 김포공항까지 가서 비행기를 탔고 정말 이륙하자마자 나는 바로 꿀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제주공항에 내리자 공항까지 이어지는 연결통로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습기가 우리를 덮쳤다.

하늘은 딱 예상했던 대로 낮은 회색이었다. 핸드폰을 켜자 습도 90% 예보가 눈에 들어왔다.

휘유. 비도 비지만 습도 높은 날씨는 참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또한 의미없는 바램이지만 그래도 혹시 예보와는 다르게 공항에 내리면 햇빛이 나지는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나는 비가 오긴 확실히 오겠구나, 하고 단단히 마음의 각오를 하고 제주에 발을 내딛었다.

딱 아침에 생각했던 대로 시간은 매우 애매하게 남았다. 사실 해안도로를 타고 멀리 가서 점심을 먹으면 되긴 하는데 제주시 쪽에 있는 맛집들은 도착해서 점심 혹은 떠날때 저녁이 아니면 따로 와서 먹을 일이 없을거 같아 그냥 먹기로 했다.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은 제주시 북쪽에 위치한 일통이반이라는 해산물 전문점. 제주 해남 1호인 분이 운영한다는 식당. 행사 준비했던 부서 및 여러 분들에게 듣기론 제주가 더 이상 '토착민' 혹은 '현지인' 식당이라는 개념이 없고 다들 관광객 위주로 세워진 곳들밖에 없다고 하지만 난 감성에 죽고 사는 인간이라 그런가. 아직도 식당, 카페, 숙소를 대충만 써봐도 가보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정작 가서 실망하는 일이 많을지라도. 그치만 작년 제주여행 때는 여러 곳에서 상당히 만족하고 돌아왔기에.

일통이반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반이었는데 12시부터 영업한다고 하셨다. 다시 한번 왜 피곤하게 굳이 9시 비행기를 잡아타고 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위를 좀 걷다가 오기로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제주항 근처 라마다와 기타 커다란 리조트식 숙소들과 이마트가 크게 포진해 있는 곳. 그리고 길을 따라 관광객용 간판 큰 횟집들이 줄줄이 있는 거리. 속초 쪽하고 매우 비슷한 느낌의 거리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백인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길에 여기저기 보였다. 점심 전의 애매한 시간에다가 찌뿌둥한 날씨와 바닷바람 때문에 거리가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보이니 묘한 느낌이었다. 아침을 안 먹고 와서인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30분을 못 참겠다 하는데 길 끝에 매우 세련돼 보이는 빵집이 보였다. ABC라는 간판에 하얀 인테리어, 게다가 외국인 배낭여행객들이 쿨하게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고 있었다. 거리와 매우 어울리지 않는 가게였는데 어쨌든 애피타이저 겸 그리 들어갔다. 빵은 매우 먹음직스럽게 보이고 인테리어도 서양식이었다. 기대하고 있는 해산물 입맛 망치면 안되니까 작은 페이스트리를 하나 시켜먹었다.  커플이 들어와서 손가락 하나만한 빵 하나 시켜서 먹고 간다고 하니 직원들이 실망한 모양인지 반응이 좋지 않았다. 꿋꿋이 창가에 앉아 먹었는데 물론 한입 크기이긴 했지만 꼭 며칠 된 것처럼 빵 맛은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나왔다. 바닷가 쪽으로 길을 건너 가보았는데 그 거리가 그런 것인지 너무나 휑뎅그렁해서 도저히 길게 걸을 맛이 나지 않았다. 이마트 뒤쪽의 공터는 어마어마한 주차장에 바닷바람은 미친듯이 불어제끼고 정체불명의 남자가 이상한 걸음걸이로 절룩거리면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우린 한숨을 푹 쉬면서 일통이반으로 돌아왔다.

여자 사장님이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아마 30분을 기다렸다가 다시 온 우리를 장하게 본 모양이었다.

추천 해산물을 시키라는 전임 여행객들의 포스팅으로 난 기대에 부풀어 추천메뉴 전복과 굴 중에 뭘 시켜야 되나 무지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친절하게 처음 왔으면 보말죽에 성게알을 먹는거라고 알려주셨다.

성게를 잘 못먹을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말하니 우리 성게는 다르다고 확실하게 추천해주셨다.

그렇다면 더 고민할거 없이 그걸로. 게다가 가만히 보니 점심에는 해산물 한상을 시키는 분위기가 아닌거 같았고 애초 그렇게 시키려면 4인 정도의 인원으로 와서 이거저거 시켰어야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장님은 여행객들에게 매우 익숙한 모양이었다. 음식이 나오자 먼저 사진을 찍으라고 친히 알려주시더니 그 다음 차례로 먹는 법을 설명해주셨고 보말에 대해 내가 묻자 주방으로 따라오라고 하여 직접 수조에서 왕보말을 꺼내어 보여주고 사진을 찍게 하시고 직접 손에 들고 볼수 있도록 안내해 주셨다. 미니 투어를 하는 느낌이었다.

왕보말과 뿔소라와 전복을 구분하긴 힘들었지만 그렇게 손에 들고 본 적은 처음이어서 새로웠다.

제주에서도 왕보말을 사용하여 죽을 내는 집은 여기밖에 없다고 자부심 있게 말씀하시길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얼른 식사를 시작했다.

사실 간을 좀 있게 먹는 내 입엔 밍밍한 편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게는 전혀 비리지가 않았고 특유의 고소한 맛이 났다. 양이 많지 않았으나 나에겐 그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느껴졌다. 양파절임, 톳무침, 미역무침, 참기름, 겨자를 적당량 얹어 성게만도 먹었다가 보말죽과 섞어서도 먹었다가 하는 코스였다.

재밌었다. 사실 전복이나 굴이나 소라도 먹고 싶긴 했는데 보말죽에 성게 코스는 서울에서 먹어보기 힘든 제주의 맛인건 확실했다. 우리가 일찍 와서 친절한 안내받고 시작한 1팀이었는데 곧 우리 뒤로 서울 여행객으로 추정되는 팀들이 하나 둘씩 들어왔다. 메뉴는 모두 동일했다. 맛있게 먹었고 친절한 사장님의 응대가 좋았고 나중에 여럿이 올 일이 있다면 저녁에 와서 제철해산물을 함께 먹고 싶은 집이었다.


날씨는 예측불가였다. 다먹고 나오니 여전히 하늘은 회색이었다. 비는 오려다 말다 하는 눈치였고 아주 가끔 햇빛이 구름 사이로 비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젠 다시 동쪽 해변으로. 숙소 가기 전에 당근 케익을 먹고 싶었다. 작년엔 비가 내렸던 하루에 숙소 옆 만화카페에서 아주 아늑하게 실컷 만화를 봤던 기억이. 

내가 이번에 찾아봤던 것은 카페한라산, 구좌상회, 바보카페 등의 이름들로 포스팅마다 에메랄드 색깔의 너른 바다가 펼쳐진 풍경과 제주 돌집의 외관과 싱그러운 잔디, 야외 테이블 등이 찍힌 것들이었다. 하늘이 회색이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는 파란 구좌 세화의 풍경이 꽉 들어차있었다. 그래서 카페한라산을 찍고 (바다가 잘 보이는 곳) 출발했다. 그런데......

제주시를 벗어나기도 전에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우레같은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이퍼 돌리는 속도를 올리고 올렸는데 소용없었다. 그야말로 열대우림 우기에서 쏟아지는 정도로 무서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해안도로를 향해 진입한 시점이었는데 차가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앞이 안보이는 것이었다. 와이퍼를 최대 속도로 돌려본 적도 처음인데다가 그렇게 했는데 앞이 안 보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핸드폰에서는 드르릉거리면서 재난문자가 왔다. 제주 동쪽 지역 호우 경보라고.

에메랄드색 바다를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나 서글퍼졌는데 그것도 잠깐이고 이젠 생명의 위협이 살짝 살짝 느껴지기 시작했다. 앞이 안 보이는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졸음까지 쏟아진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주유소가 있는 공터에 잠깐 차를 세웠다. 남편은 잠깐 눈을 붙이겠다며 의자를 뒤로 확 젖혔고 조용한 가운데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만 가득한 차 안에서 나는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작년에는 3일을 있으면서 하루는 맑고 하루는 흐리고 하루는 비가 왔었다. 나름 괜찮았었다.

그때도 5월 황금연휴여서 사실 날씨는 괜찮았어야 하는 때였다. 그리고 지금도 9월말. 여름이 태풍 때문에 위험하다 해서 일부러 피한다고 왔는데 이런 무서운 폭우로 운전까지 못하게 되다니. 

지금 난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짝사랑에 빠져 헛발질을 하는 느낌이랄까. 고작 2번 갔는데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난 다음번에 제주도를 올 때 도대체 몇월에 와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맑은 날씨에 바다도 보고 올레길도 걸어보고 싶을 뿐인데.

주말을 꼭 껴야 하고 부부가 시간이 맞을 때 그냥 가야하는 직장인의 숙명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어렵게 날을 맞춰 왔는데 폭우가 쏟아지면 그냥 이게 내 운명이고 하늘의 뜻이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어렵게 날을 맞춰서 수강신청 하듯이 취소표를 잡아 채서 겨우 왔지만 폭우가 쏟아지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뜻인 것이다. 이래서 인생은 내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 무언가 더 큰 분의 뜻과 섭리에 의해서 결정되고 흘러간다고 하는 것이다. 날씨 따위에 휘둘리고 분노하고 싶지 않다면 용감하게 휴직을 내고 한달살이라도 와야 하는 것이다. 주중이건 주말이건 어느 날 쨍하게 개고 햇빛이 나면 그때 여유있게 올레길을 걸을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며 밥먹고 다니는 직장인이니까. 에메랄드 빛 바다는 마음 속에 고이 접어두고 비오는 제주를 즐기다 가야지.


남편이 잠깐 눈붙이는 사이에 난 혼자 이런 생각을 멍하니 하다가 갑자기 차를 좀 옮겨달라고 주유소 직원이 문을 탕탕 두드리는 바람에 둘다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빗줄기가 살짝 진정되고 있었다. 이럴 때 빨리 움직이자고 해서 우리는 카페한라산으로 향했다. 와보니 작년 우리가 묵었던 숙소 근방이었다. 그러나 사진에서 봤던 에메랄드색 바다는 없었고 똥색 흙탕물이 관을 통해 콸콸콸 쏟아져 들어가고 있는 바다는 파도까지 사납게 몰아치고 있었다. 하늘은 회색이고 바다는 흙색이었다. 파라다이스에 왔다기보다는 황막한 미래도시에 온 느낌이었다.

이 날씨를 피해 카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가정집 두 채를 개조해서 만든 카페한라산은 딱 '제주감성' 느낌을 내는 전형적인 제주도의 카페였다. 노출식 인테리어에 다양한 중고가구들을 빈티지한 소품과 배치한. 인스타에서 많이 볼 법한 느낌의 그런 카페. 다만 맑은 날에 오면 주위 풍경과 함께 싱그러운 느낌이 날 것 같은데 오늘은 좀 아니었다. 게다가 주문은 메인 동에서만 받기 때문에 이미 자리가 다 차서 옆 동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우산을 쓰고 커피와 케익을 옮겨야 했다. 때마침 우리 게 나왔을 때 빗줄기는 다시 굵어졌다. 아까 같은 폭우였다. 그렇다고 자리도 없는데 가만히 서서 커피가 식도록 기다리기도 싫고 세 걸음만 가면 되니 난 우산을 쓰고 나섰다. 동에서 동으로 옮기는 3초의 시간에 이미 등짝과 바지가 다 젖은 남편은 질색을 하면서 자긴 젖는게 너무 싫다며 툴툴거렸다. 아마 옷이 젖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거라고 생각한다.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어디 그대로 앉아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떡하겠나. 우리는 폭우가 내리는 제주로 휴가를 보내러 왔는걸. 우리가 피신할 곳은 카페한라산 뿐이니 그냥 앉는 수밖에.

다행히 만석인 메인동과는 달리 옆동은 사람이 없어 나는 지금 카페를 전세낸 것 같은 기분으로 열심히 제주일기를 쓰고 있다. 커피는 그냥 그렇다. 내가 먹고 싶었던 당근케익도 그냥 그랬다. 구좌상회의 당근케익은 특별할까.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갓 구웠을 때 먹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냉장고에서 나온 케익은 역시 별로다.

비가 쏟아지는 이곳의 창문만 근사하다. 젖은 옷도 축축한 공기도 나의 기분도 우습기만 하다. 뿌연 바다와 옆동의 지붕이 보이는 카페의 창문만 근사하다. 


방금 동생에게 카톡이 왔다. 서울 날씨는 너무나 맑다고. 그야말로 9월말 10월초 특유의 상쾌한 초가을 날씨겠지. 지난주 주중 내내 그랬으니까. 그래서 여길 예약한 건데. 믿기지가 않는다. 가장 상쾌한 날씨일 때 서울을 등지고 호우경보가 내려진 제주도로 휴가를 오다니. 인생이란게 이런 것인가 싶다. 

엄마는 그래도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게 중요하다는 말을 전해왔다. 물론 그 말이 매우 일리있는 말이라는 것은 많이 느꼈고 그래서 요즘도 노력중이긴 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끌고 끌다가 올해 드디어 브런치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고 그렇게 끌고 끌다가 이번주 겨우 노트북을 구입하여 (그것도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세팅을 완료하여) 여기서 난 처음으로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다 운명이고 섭리인 것이다. 질질질 끌면서 행동 못하고 있던 내가 글을 쓰도록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별것도 아니지만 나는 이번 3일 동안은 찌뿌둥한 회색 하늘과 함께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의 모처를 돌면서 마음껏 글을 써봐야겠다.

갑자기 드는 의문. 제주도와 토끼는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숙소를 검색할 때 토끼를 컨셉으로 한 토끼 관련 이름이 많았고 오는 길에도 토끼네 라는 호스텔을 하나 보았고 (그리고 그 호스텔 문앞에는 작은 토끼조각들이 여러개 서있기까지 했다) 지금 이 카페 안에는 커다란 토끼 이러스트의 천이 천장에 걸려있다.

구좌가 당근이 유명해서? 당근을 좋아하는 토끼를 걸어놨나...

여기서 마음을 좀 가라앉힌 후에 어쩌면 이번 여행의 컨셉을 가장 크게 녹인 나의 선택. 취다선 리조트로 들어간다. 이어서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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