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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Dec 13. 2020

베를린 누아르

하드보일드와 고전을 좋아한다면-

지겹고 힘든 한 해였다.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묘하게 일이 없는 자리에 배치되어 가장 일에 민감한 사람들 사이에 섬처럼 끼어 앉아서 스트레스만 잔뜩 받으면서 보낸 한 해였다. 도무지 생산적인 성과라고는 없어서 밥을 먹어도 소화도 안 되고 요가와 독서에만 기대서 시간을 보냈다. 사실 독서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수동적인 소모행위라 크게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왜 나는 글을 짧게도 쓰지 못하는 것일까 곱씹고 또 곱씹었지만 의욕과 생산성은 연말이 될수록 더 심하게 떨어졌다. 정신적으로 위축되면 시간이 많아도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도 정작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는 떨어지는지. 에너지의 고갈인지 의지박약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루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나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다행히 도서실에 좋은 차장님이 새로 오셨고 책의 배치부터 새로운 책 구입까지 열정적으로 임해 주셔서 나는 여러 권을 읽을 수 있었다. 

최근 여러 정보와 물건의 홍수 속에서 내 취향에 맞는 필터 역할을 하는 편집샵의 존재를 간절히 느끼는 중인데 다행히도 그런 출판사를 하나 알게 되었다. 미미여사의 에도시리즈를 모두 출간한 북스피어 출판사다. 마포 김사장이라는 이름으로 블로그도 운영하시는 사장님의 블로그를 우연히 방문했다가 수많은 다른 책들도 알게 되어 하나씩 읽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매우 만족스럽게 읽었던 작품이 바로 베를린 누아르 3부작이다.

나는 추리/미스터리 소설의 팬이다. 알려진 유명한 작가는 대부분 읽은 것 같다. 그런데도 내가 모르는 수많은 다양한 작가들이 전세계에는 아직 많은 것 같더라. 다행이면서 즐겁기도 한 발견이다. 필립 커 또한 내가 처음 듣는 작가였는데 최근 맛을 알게 된 하드보일드 장르의 소설을 1900년대 초 베를린을 배경으로- 필립 말로우가 그 시대 독일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컨셉으로 집필하였다고 한다. 이 설명만 봐도 너무 맘에 들어서 바로 신청하고 읽었다. 

추리소설의 트릭보다는 거기 나오는 인물들, 그들의 심리와 행동의 배경, 그리고 그 당시의 생활상 등이 매력 포인트인데 그런 면에서 이런 고전 추리소설들은 여느 문학작품보다 훨씬 밀도 있고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예전엔 만연체에 감성적인 작품들이 좋았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담백하고 깔끔하면서 꽉 채워진 그런 문장들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면에서 좀 건조하지만 하드보일드 계열의 소설들도 참으로 매력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좀 더 리얼한 세상의 단면을 보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다 잡았으면서도 히틀러가 대두하던 시기의 특수한 시대배경을 잘 살린 이 누아르 3부작은 정말 흥미롭고 몰입도 높은 소설이었다. 국가사회주의라는 극단적인 파시즘이 등장하게 된 당시의 배경은 사회적으로나 인간 개인의 심리 측면에서나 흥미로운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 불안이 확대되고 있는 요즘과 상당히 유사한 측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범죄의 면면을 보면 인간의 본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인간의 본성이 같기 때문에 역사는 되풀이 된다. 그래서 옛날 이야기는 재미있다. 독일 배경의 소설이어서 그런가, 역시 범죄와 고문의 수준은 나에겐 잔인했다. 예전 밀레니엄 시리즈는 도저히 잔혹해서 보고 싶지가 않았었는데 이번 소설은 그래도 쭉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나이도 들었고, 그런 잔혹성보다는 전체적인 소설의 배경과 인물 묘사, 그리고 이야기의 전개가 훌륭했고. 게다가 옛날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니만큼 건조하지만 그래도 묘한 고전 특유의 아름다움이 살아 있어 3권을 쉬지 않고 끝까지 읽었다. 이 시리즈는 3권이 끝이 아니라 꽤 여러 권이 있다고 하는데. 아주 오랜만에 맘에 드는 무게있는 소설이었다. 나머지도 또 번역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사장님에게 나중에 쪽지라도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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