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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May 16. 2021

비오는 주말

로스트 제너레이션

날이 갈수록 기후는 변덕스러워지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역대급 황사가 덮쳐 토요일 내내 미세먼지 지수가 세자릿수 상단을 벗어나질 못했었는데 이번 주말에는 토일 모두 비 예보가 떴다. 물론 날씨가 좋아도 특별한 일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젠 야외에서 운동을 할 수 있고 없고가 컨디션에 큰 영향을 끼치는 나이가 됐다. 며칠이고 집 안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집순이들의 얘기를 들으면 옵션이 있다는 것에 너무나 부러워진다. 나는 이제 순환에 문제가 있는지 하루라도 바깥 바람을 쐬고 움직이질 않으면 소화가 안되고 머리도 아프고 컨디션이 영 좋지가 않다. 그래서 재택근무도 썩 반갑지가 않다. 그런 와중에 미세먼지가 덮치고 주말 내내 비가 쏟아지거나 하면 컨디션 관리에 적색경보가 켜지는 것이다.

토요일 비가 오락가락 오가더니 본격적으로 밤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요일 아침은 오랜만에 눈 떴는데 창밖이 회색으로 어두운 그런 날이었다. 이런 날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될 것 같은 묘한 편안함이 좋긴 하다. 마침 어제 귀찮은 집안일들을 몇 개 해놓았기 때문에 더 느긋한 마음으로 오전 내내 노닥거렸다. 비는 꽤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원래는 어제 엄마가 가져다 준 쌈채소랑 집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피자를 먹고 싶다고 했다. 이미 몇 끼 연속 한식을 먹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래서 최근에 감명받았던 몰토베네에 전화를 해보았다. 비가 와서일까? 한 자리가 남아있다고 하여 바로 출발했다.

비가 많이 내리긴 했지만 다 젖을 정도의 폭우는 아니어서 기분이 좋았다. 거리엔 사람이 많이 없고 비는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6호선을 타고 상수역에 도착해서 몰토베네까지 한적한 거리를 기분 좋게 걸었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지만 이런 식당은 예약이 꽉 차 있다. 매번 느끼지만 이 시대를 한가지로 표현하라고 하면 양극화일 것이다. 코로나건 뭐건 잘 되는 곳은 미어터지고 또 한 쪽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정말 한적한 주택가 한 가운데 있는 몰토베네는 멋진 식당이다. 진하고 어두운 파란색의 몰딩, 까만 격자창 같은걸 보면 이상하게 런던이 떠오른다. 런던의 골목에서 볼 것 같은 외관이다. 비록 이탈리안 식당이지만. 주택가 골목에 작게 자리한 모습도 그렇고. 안에 앉아서 비가 내리는 바깥 풍경을 보는 것도 근사했다. 마치 유럽에 온 것 같이. 

여긴 재료를 어떻게 공수해서 피자를 구워내는 것일까. 이곳의 피자는 정통 이탈리아 피자라기보다는 프랑스 빵집에서 갓 구워낸 바게트를 먹는 것 같다. 그 위에 프로슈토와 루꼴라는 이탈리아의 맛이니 어찌 보면 믹스된 느낌도 나고. 사실은 좋은 재료로 만든 바게트 샌드위치 맛이었는데 어쨌든 그 기본의 충실한 맛이 너무 맛있어서 나오자마자 게눈 감추듯 삽시간에 먹어치웠다. 보리로 만들었다는 오르조또는 아주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소스나 만듬새는 수준급이었다. 무엇보다도 피자의 임팩트가 굉장히 강한 집이다. 문득 이 최고의 바게트 피자가 현지에서 재료 사다가 먹는다고 생각하니 가격이 비싸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건 만리타국 서울에서 먹는 값이라 생각해야겠지. 

우리는 운 좋게 남은 한 개 테이블을 잡은 것이었고 나머지는 다들 미리 예약한 모임이나 커플들로 식당은 만석이었다. 모자라다 싶은듯 피자와 오르조또를 하나씩 먹어치운 우리는 계산하러 일어났다. 너무 빨리 먹고 일어난 우리를 보고 가게 주인은 놀란 모양이었다. 식사는 괜찮았냐고 하며 물어봤다는 주인의 말을 남편이 전해주길래 나는 그만 웃음이 나왔다. 대화도 없이 무섭게 먹어치우고 나온 우리가 그 식당에선 얼마나 이질적이었나 싶었지만, 대화에 약한 남편을 이제는 받아들이고 마음의 평화를 찾은지라 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나 이태리는 말도 없이 밥만 먹어치우고 나오면 문화가 없다고 생각해- 라고 웃으며 말하다가 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는 남편을 보고 난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말이 많고 대화를 좋아하고 또 문화를 좋아하는 내가 가장 그것과 멀리 있는 남편을 만난 것도 우습고, 일찌감치 유럽을 쏘다니고 문화광처럼 신나게 살아왔던 내가 정작 양식도 커피도 술도 못 먹는 것이며 그런 것과 가장 멀리 살아온 남편은 실제로는 한국인의 모습을 한 서양인의 소화기관을 가진 것도 모두 우습다. 인생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있는 블랙 코미디와 같다. 힘들지만 그래서 유머를 잃으면 버티기 힘들다.

어제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정성껏 싸서 나에게 가져다 주면서 엄마는 그랬다. 너무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고. 사람은 생긴대로 순리대로 사는게 맞는 것 같은데, 그게 자연의 섭리인 것 같은데 묘하게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결국 손주를 보지 못한 채로 딸과는 멀리 떨어져 살게 된 엄마는 이제는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덤덤하게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학생때까지만 해도 상당히 분명하게 꿈꾸었던 나의 삶이 너무나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에 대해 엄마에게 드문드문 이야기했다. 자연스러운 흐름과도 노력과도 상관없이 어느새 너무 다른 모습으로 공중에 붕 떠버린 것 같은 지금의 나에 대해서. 평범한 삶과 특별한 삶, 어느 한 쪽도 잡지 못한 채 어설프게 중간에 붕 떠버린 나에 대해서.

그냥 파리바게트나 들어가서 잠깐 얘기하고 헤어지자는 엄마를 굳이 힙한 카페로 끌고 간 터라 우리 주위엔 외국인을 비롯, 주말의 소확행을 위해 멋지게 차려입은 젊은 사람들이 커다란 소파 여기저기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트렌디하게 꾸민 카페 안에서 엄마와 나만 편한 차림에 인생의 씁쓸한 얘기를 담담하게 하고 있었다. 주위와 우리가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이상하기도 했지만 원래 나는 이런 기묘한 상황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나에게 걸었던 엄마의 기대와 행복에 대해 듣고 있으니 견디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참으로 평범하고 소박한 것이지만 묘하게 맞춰지지는 않는 어려운 퍼즐 같은 것이었다. 슬프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미안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은 차가워지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왠지 울고 싶었지만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 눌러담았다.

카페에 몰려든 젊은 사람들이 모두 실체없는 가느다란 소확행을 위해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불과 한 세대 전, 십 몇 년전까지만 해도 당연했던 행복한 인생의 공식이나 본질은 어느새 흐려지고 우리는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미래를 앞두고 불안한 현재를 살고 있다. 엄마에게 말했듯 이제는 더 이상 정답을 정하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유연하고 자유롭게 살 것이다. 지금의 불안과 황량한 이 느낌은 분명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현상인 것 같다. 거스를 수 없는 구조적 흐름이 있고 나라는 개인이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영역이 있다. 헤밍웨이가 그린 잃어버린 세대는 어딘지 멋지게 다가왔지만 현실의 나와 동년배들은 참 힘들고 작게만 느껴진다. 그렇지만 또 하나의 새로운 비전을 만들 수 있는 건 역시 내 안에 숨어있는 것 같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은 신비로운 것. 섣불리 체념하지 말고 끝까지 지켜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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