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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Sep 30. 2019

제주여행 : 3일차

결국 이번 여행은 비가 따라다니는 여행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여기는 서귀포 혁신도시에 있는 비브레이브라는 조용한 카페. 억수같이 쏟아져서 시야를 가릴 정도의 비를 피해 급히 검색해서 들어왔다. 처음 제주도에 도착해서 운전을 시작할 때 위험을 느낄 정도로 비가 내려서 길가에 세웠었는데 이제 돌아가는 마지막 여정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역시 여행은 날씨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 한여름과 같은 찬란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성산 바다는 내가 꿈꾸었던 에메랄드 빛깔이었다. 이미 올레길 순례족들이 걷기를 시작하였고 차들이 상쾌하게 지나다녔다. 어제 반쯤 예상했던 바와 같이 7시 명상은 결국 가지 못했지만 3일차에 드디어 보이는 아름다운 햇살과 풍경에 나는 너무나 희망차게 기상했다. 조식을 주는 식당은 원래부터 하와이안 분위기였는데 강렬한 햇빛을 받자 드디어 빛을 발했다. 비만 안 내렸어도 테라스에서 먹으면 딱인데. 우리는 기분좋게 들깨떡국으로 아침을 마치고 들어왔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어제 했던 다도를 한번 더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실 두 번 해도 전혀 나쁠건 없었지만 이 여행은 줄곧 안 좋은 날씨에 쫓기고 있었던지라 나는 이 얼마 안되는 시간에 어서 밖으로 나가 자연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이틀동안 조바심과 절망으로 속을 졸였던 것이 무슨 소용이었나 싶어서 오늘이라도 그러지 말고 편안하게 하루를 보내자는 생각으로 가자고 했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취다선을 예약한 것은 이번 여행에서 신의 한수였다. 거의 절망의 구렁텅이 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여행을 끌어올려준 구세주였다고나 할까. 스탭분들은 내가 얼마나 고마운 마음으로 묵었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어제 마셨던 흑차가 맛도 향도 독특하니 좋았어서 티백도 따로 몇개 더 사고 즐거운 마음으로 숙소를 출발했다.

햇빛이 찬란하니 맘에 여유가 생겼다. 게다가 일기예보는 오전이 비, 오후가 해로 되어 있었다. 오늘 하루는 맑게 지내다 갈 수 있겠구나 하며 일단 점심 전에 소화도 시킬겸 인근의 용눈이오름으로 향했다.

작년 여행 때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오름이라 하여 안돌인가 밧돌인가 하는 오름에 갔었는데 주차장도 잘 안되어 있는 비포장 도로에 가보니 쥐새끼 한마리 없는 상태에서 힘들게 올라가느라 좀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대중적인 곳으로 가자 하여 이곳을 가게 된 것이다. 가는 길은 푸르고 제주의 돌담이 이어졌고 내가 딱 보고 싶었던 제주 드라이브 길이라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그렇게 용눈이오름 주차장에 도착했다. 사람도 차도 많았고 오름은 데크길로 하여 오르기에 딱 적당해 보였다.

그런데... 어느새 하늘에 회색 구름들이 스멀스멀 몰려들기 시작했다. 엥 이게 어쩐 일이지. 하고 혹시나 하는 맘에 일기예보를 보았다. 분명 오전 비, 오후 해로 어젯밤까지 나와있던 예보는 어느새 오전 오후 비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게다가 오전 숙소에서는 분명히 늦여름 하와이의 날씨였는데......!

하늘은 파랗긴 했다. 흰 구름도 있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회색 비구름도 넓게 섞여서 깔려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오름을 서둘러 오르기 시작하자 부슬비가 날 따라왔다. 우습게도 확 내리는 것도 아니고 15~20분 간격으로 내렸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했다. 우산을 쓰기도 뭐하고 안 쓰기도 뭐한 참 웃기는 날씨였다. 게다가 이런 날씨 특유의 습도 때문에 몸은 금세 끈적끈적해졌다. 해가 안나니 무척 덥지는 않았지만 습도 때문인지 묘하게 여름 찜통 더위 같은 느낌이었다. 

난 착잡한 마음으로 오름을 올랐다. 오름 자체는 참 좋았다. 만일에 맑은 날이었다면 정말 부담도 없고 누구에게나 강추할만한 곳이었다. 알프스 산 윗쪽 올라갔을 때처럼 넓은 골짜기가 보이고 분화구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끈적거리는 습도와 날파리와의 싸움이었다. 정상에서 보이는 성산일출봉과 시원한 전망은 낮게 깔린 비구름과 뒤섞여 아련하게만 보였다.

힘들게 내려와서 차에 타자마자 에어컨을 틀었다. 에고... 참 쉽지 않구나.

그래도 걷고 나니 좀 컨디션은 좋아져서 점심을 먹기 위해 서귀포 공천포식당으로 향했다.

남쪽으로 향하면서 날은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다. 위미에 가까워지자 감귤밭과 작은 돌집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아름다운 동네풍경이 펼쳐졌다. 드라이브 하기에 참 좋은 곳이 역시 제주다. 그리고 하늘이 파래지면서 다시 햇빛이 쨍하게 내리쬐기 시작했다. 공천포 식당은 바다에 바로 면해 있었는데 진한 파란색의 바다는 그야말로 여름바다였다. 아이들이 현무암 해변에서 뛰놀고 있었고 동네는 고즈넉하니 한가로웠다.

남쪽이 좋구나- 난 쨍한 햇볕에 다시금 기분이 좋아져서 흐뭇하게 바다를 바라보다가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날씨가 엉망인 대신에 숙소와 식당은 압도적으로 괜찮은 여행인데 공천포식당도 그랬다.

이번에 네이버 포스트 도움으로 쉽게쉽게 좋은 곳들을 참 잘 찾아다녔다. 

여긴 제주식 물회 맛집인데 일단 2014부터 블루리본 매년 달았고 각종 매스컴도 탄 집이라서 믿고 가보았다.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전복소라 물회 한그릇에 전복회덮밥을 시켰는데 가격에 비해 너무나 실하게 나와서 예상보다 훨씬 맛있게 배부르게 먹고 나왔다. 원래는 생물 한치를 섞어 시키는게 정석이라는데 오늘은 마침 재고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연히 이틀차까지 전복을 먹을 일이 없던 우리는 싱싱한 전복을 실컷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물회가 15천원 1인분으로 시킬 수 있다는게 2명 여행자들에겐 좋았고 그런거 치고 양을 넉넉히 넣어주셔서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원없이 먹었다. 같이 나온 밑반찬들도 맛있어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여긴 된장을 풀어 만드는 제주식 물회를 내는 게 특징인 집이라는데 내 입에 잘 맞고 좋았다. 역시 여행엔 로컬푸드가 좋다. 게다가 가격도 맛도 양도 만족이니 블루리본 5년째 단 거 인정.

햇빛이 찬란한 남쪽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노닥거리다가 가보고 싶었던 테라로사 서귀포점으로.

마침 가까운 거리였다. 명승지인 쇠소깍 바로 옆에.

와. 나도 테라로사 꽤 여러 지점 가보았는데 서귀포점 참 좋았다. 역시 날씨와 자리 때문인건가?

테라로사 특유의 넓고 높고 세련된 인테리어는 사실 비슷했던거 같기도 한데 창밖으로 빽빽한 야자수들과 남국에서 주로 보이는 낮은 관엽목 정원, 작은 감귤나무밭이 너무나 싱그럽고 좋았다. 바다가 안보이는데도 너무 좋았다. 심지어 자리가 없지 않을까 걱정하고 갔는데 인구밀도도 적절한 것이었다.

내가 작가라면 여기와서 글쓰고 싶다, 생각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편히 쉬었다. 이국적인데 세련된 이 분위기는 진짜 하와이 같았다. 쇠소깍에서 시작하는 올레길 6코스를 걷고 그 후엔 성이시돌 목장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다, 하면서 흐뭇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건.... 비구름이 내 뒤를 쫓아 계속 달려오는 느낌이었다! 남쪽으로 피신해서 여긴 괜찮아, 하고 있는데 너 이 녀석, 잡았다! 하는 그런 느낌......

나가보니 이미 여름처럼 파랗고 쨍했던 하늘은 불과 1시간만에 회색 비구름으로 가득 덮여있었고 언제 빗방울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날씨가 되어 있었다. 또다시 착잡해진 마음으로 그래도 올레길을 발은 디뎌봐야지 싶어서 6코스를 따라 흐린 날씨와 함께 걸었다. 

쇠소깍은 몇 포스팅에서 봤던 것처럼 사실 좀 작은 연못 느낌이긴 했다. 사람들이 거기서 나룻배를 열심히 타고 있었는데 딱히 타보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지는 않았고 그보다는 해안선을 따라 걷는 올레길 6,7코스가 더 맘에 끌렸다. 처음 쇠소깍 주차장에서 시작을 하려는데 살짝 헤맸다.

내가 잘 못찾는 것일수도 있겠는데 제주올레 홈페이지에도, 어떤 포스팅에도 올레길 6코스를 걸을때 어느 지점에서 시작해서 어떤 길을 따라서 걸으라는 안내는 찾을 수 없었다. 유명한 관광지니까 싶어 길가 행상인에게 물어보았다. 옆에 관광안내소를 가리켰다. 여긴 올레길 공식 안내소였다. 다행이다 싶어 갔는데 안내소는 뭔가 허접한 느낌이었다. 안내소를 지키는 아저씨는 올레길 코스 가는법을 묻자 대뜸 지도책자부터 내밀었는데 이건 제주도 전도에 1부터 21코스를 크게 표시하고 이름을 적어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6코스가 대체 시작점이 어디며 어떻게 가야하냐고 물으니 왼쪽 쇠소깍 전의 다리부터 시작하는데 어차피 이리로 돌아오게 돼있으니 바다 옆옆쪽으로 그냥 오른쪽으로 걸으라는 말을 뭔가 굉장히 헷갈리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나와서 봐도 올레길을 표시하는 어떤 표적도 찾을 수 없었다. 바닷가 옆길은 데크로 만들어놓은 산책길이었는데 사람들이 드문드문 벤치에 앉아 있고 그냥 끝이었다. 오른쪽 끝으로는 커다란 방파제, 그리고 언덕쪽으로는 우리가 갔던 테라로사가 위치한 막다른 골목이었다.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일본과 비교해서 우리나라가 관광산업이 뒤떨어졌다는 얘기는 한참전부터 귀가 뚫리게 많이 들어왔다. 사실 그 중에서도 제주도는 우리나라 관광산업의 선두주자와 같은 곳이다.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면 컨텐츠나 분위기가 꽤 잘 개발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올레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거리인거 같은데 난 국내 관광객인데도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오른쪽으로 걷다보니 갈림길이 나왔는데 대체 어느쪽이 올레길인지 어떤 표식도 세워져 있지 않았다. 방파제 쪽은 영 아닌듯하여 되든말든 테라로사 언덕쪽으로 올라갔는데 거기서 막다른 골목이라 생각했던 쪽에 숲속으로 길이 계속 이어지긴 하길래 그리로 발을 옮겨보았다. 그때 보니 길에는 파란 줄이 그어져 있고 가끔씩 제주 환상도로인가 해서 자전거 코스라는 표시가 길에 찍힌걸 보았다. 이게 올레길인가?

그러다가 숲속으로 통하는 1차선 도로를 걷다 보니 어디서 봤던 제주 올레길의 표식이라는 조랑말 모양의 조형물과 나무에 매달려있는 올레길 리본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아. 이건 참... 너무 안타까웠다. 표지라는 것은 길 안내가 필요할 때에 나타나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올림픽 공원 산책로를 가도 길 이름, 전체 몇 km 중 내가 얼마나 와는지를 표시한 팻말이 정기적으로 나타나는데. 너무 아쉬웠다. 파란 페인트가 실제로 올레길을 표시한 거였다면 안내지에는 그게 표시가 되어 있었어야 했고 안내소 직원도 파란 페인트를 따라 걸으면 된다고 말해주면 헷갈리지 않을 텐데.

그리고 표지판은 길이 갈라지는 곳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표지판을 꽂는다면 제목인 올레길 6코스와 가야할 방향, 몇 km 지점 정도까진 표시할거 같았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게우지코지인가 하는 지점까지 와서 벤치에 앉아 회색빛 하늘과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올레길 종주는 이렇게 끝이었다. 3일 내내 무언가 시작하려다가 비가 내려 끝나는 그런 여행이었다.

아쉽지만 차로 돌아왔는데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흐려도 목장에 가고 싶다던 남편도 생각을 바꿔서 우리는 또 카페로 들어가야만 했다. 서귀포 방면으로 향하는데 비는 무섭게 굵어지기 시작하여 다시 첫날의 공포 비스무리한 상태로 변했다. 차에서 급히 검색해서 목적지를 바꿔대는 것도 참 멀미날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가깝게 들어온 곳이 바로 이곳 비브레이브. 서귀포의 혁신도시라는 널찍하고 조용하고 신도시에 자리한 카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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