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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Sep 28. 2019

제주여행 : 2일차

여행을 좌우하는 가장 큰 변수는 날씨이다.

이번 여행은 날씨가 정말 운이 따라주지 않았지만 그걸 살린 건 우연히 선택하게 된 숙소였다.

지금 묵고있는 곳은 제주 성산항 근처 취다선 리조트.

얼마 안있어 입소문이 날거라고 생각이 되지만 정말이지 빼놓을 곳 없이 괜찮은 숙소다.

작년 제주에 다녀온 이후 다양한 컨셉의 아름다운 숙소에 반해 나는 스테이폴리오 등을 통해 숙소 위시리스트를 한움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개성있는 독채 숙소들을 다 제치고 이번에 여길 예약하게 된 것은 명상과 다도 등 힐링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비가 쏟아지는 이 악조건 속에 이 숙소가 더욱 빛을 발했던 것이다.

첫날 앞이 안보일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 속에 로비에서 들고온 책들을 보다가 우린 일찍 잠들었다. 물론 그 전에 오늘 아침에 하는 동적명상 클래스를 미리 예약해둔 상태였다.

이 리조트는 두개의 명상코스와 다도 코스를 숙박하는 손님들에게 무료로 제공한다.

여기를 설립한 분이 아마도 명상과 다도에 정통하여 뜻을 품고 리조트를 만든 모양. 아침 7시에는 그분이 직접 진행하는 정적인 명상을, 8시부터는 다른 선생님이 진행하는 동적 명상을 참여할 수 있다.

요가학원을 다니면서 둘 다 해보았지만 역시 정적 명상은 5분 이상을 넘기기가 쉽지가 않고 상당히 어려운 경지로 느껴지는 반면에 몇년 전 해보았던 동적명상이 의외로 안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데에 효과적이었던 기억이 있어 이걸 먼저 신청한 것이었다. (그리고 7시 기상은 사실 자신이 없었다)

리조트는 모든 객실이 성산항 바다를 마주하고 있으며 통유리창 바로 앞쪽에 평상형 침대가 자리하고 있어 무척 아름답다. 오늘 일어나니 비는 그치고 하늘이 조금씩 개이고 있었다. 그 풍경만으로 어찌나 상쾌하던지.

명상실은 바다가 아닌 리조트 뒤쪽을 바라보는 쾌적하고 넓은 공간이었는데 이쪽은 넓은 늪지를 두고 저 멀리 펼쳐지는 낮은 언덕들이 평화로웠다.

1시간 동안의 동적 명상은 앉았다가 일어서 걸었다가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기도 하고 다양한 단계로 진행되었다. 즐거웠다. 이곳을 취재하러 온 것으로 보이는 한 외국인 커플이 있었는데 특히 음악과 함께 몸을 마음껏 털어내는 동작에 이르자 확연히 우리나라 사람들과 외국인이 구별됐다. 묘하게도 이런 동양적인 활동조차도 오히려 서양인들이 더 거리낌없이 편하게 참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실은 현대의 동양사상이라는 것은 서양인들에 의해 정의되고 발굴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물질문명과 산업화에 지쳐 동양의 정신적인 문화로 돌아오려고 하는 지금 우리는 아직 서양문화를 쫓으며 우리만의 주관과 색깔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아침 1시간의 동적 명상은 기분을 아주 상쾌하게 만들어주었다. 이 리조트 바로 앞에는 제주칼국수라는 식당이 있는데 아마 리조트와 한 묶음으로 운영이 되는 곳인거 같다. 조식도 이곳에서 먹을 수 있다. 전복죽, 성게미역국, 들깨떡국 중 택일. 앞에 두개를 시켜 먹었는데 깔끔하고 맛있었다. 반찬도 정갈하고. 참 실속있는 숙소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일기예보는 오늘도 종일 우산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파랗게 개이고 습도가 좀 높지만 햇빛이 비치는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난 포기했던 우도를 오늘 그냥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남편이 아침까지 먹고는 다시 피곤하다고 쓰러져 자는 바람에 결국 오전이 그냥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점까지 갔을 때 남편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출발해서 코앞인 성산항에서 12시반 배를 타고 우도로 들어가게 되었다. 

다시 쓰고도 참 아깝다. 아침 일찍 10시반 배를 타고 들어갔더라면 흑흑.

예상되는 스토리지만 전기자전거를 빌려 신나게 우도를 반쯤 돌았을 때 비가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비가 오는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우도 절반쯤 돌았을 때 나온 하하호호 라는 버거집에 들어가서 젤 좋은 창가 자리에 떡 자리를 잡고 너무 맛있는 버거 두개를 시켜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우고 땅콩아이스크림까지 후식으로 시켜서 늘어지게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진 정말 습해도 완벽했다. 하하호호는 우도에서 9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버거집이라는데 제주도 특유의 낮은 돌집, 작은 섬의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살린 전형적인 핫플이었다.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한가롭게 안팎을 돌아다니고 창가 자리에선 바로 앞에 펼쳐진 우도의 바다와 해안도로를 지나가는 여행객들이 보였다. 흑돼지버거와 딱새우버거 등 제주스러운 버거들은 맛도 좋았고 느끼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주인들까지 친절했다. 오래된 식당엔 다 이유가 있다며 만족스럽게 즐기고 나오니 비가 어느새 내리고 있었다...

그때 나의 심정이란. 어제 비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가 오늘 아침에 일거에 다 날아가는 줄 알았는데 잊고 있었던 마수가 다시 내 뒷덜미를 잡아채는 심정이랄까. 빗줄기는 눈깜짝할 사이에 굵어져서 밖에 서있기도 힘들어졌다. 무거운것을 질색해서 자기 몫으로 내가 직접 가방에 챙겨넣어줬던 우산을 차안에 촐싹 두고온 남편 때문에 내 미니우산을 둘이 붙어 쓰고 하염없이 바다를 쳐다보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옆집 밤수지맨드라미 책방으로 피신했다. 땅끝. 우리나라에서 가장 멀리 있다는 작은 독립서점의 한 구석에 커피를 시켜 작은 창 밖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난 맥없이 앉아있었다. 역시 비때문에 모든게 안되는구나.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이번 여행은 그냥 안되는가보다. 서글픈 마음으로 병안에 갇힌 파리와 같은 심정으로 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섬 안의 섬, 우도의 끝자락 작은 책방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는 내가 까마득하게 작은 존재로 느껴졌다.

시간은 3시. 우리는 결단을 내리고 자전거업체에 전화하여 SOS를 쳤다. 커다란 용달트럭이 와서 자전거들과 우리를 픽업하여 우도를 가로질렀다. 사진에서 봤던 청명한 날의 아름다운 밭과 돌담들과 우도 안의 오솔길들이 우리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비는 계속 세차게 내렸다. 십년전 감탄하며 보았던 에메랄드 빛 우도의 바다도, 오름도 다 이번엔 아니었다. 우리는 빠르게 배를 타고 성산항으로 돌아왔다.

우도 왕복 배값에 전기자전거 대여료에 (그것도 시간 무제한 요금) 비를 피하기 위해 엉겁결에 들어가 추가로 마셨던 커피에. 우도발전기금만 알차게 지불하고 돌아가는 나의 심정은 참으로 서글펐다. 정확히 2시간, 우도 반바퀴를 마지막으로 난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남편은 이왕 이렇게 됐으니 다도 코스나 들어보자고 했다. 뭐 딱히 대안도 없었다. 비는 계속해서 어제처럼 세차게 내렸다. 비를 맞으며 다니는게 은근히 피곤한 일이었는지 숙소에 와서 씻고 나서 난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5시반에 예약한 다도를 위해 다시 명상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아.

다도실에 들어서자 나의 서글펐던 마음이 단박에 사라졌다.

시원한 통유리로 저수지와 구릉이 보이던 넓은 명상실과는 또 다르게 다도실은 너무나 공들여 아름답게 구성돼 있었다. 다도실에 면한 통유리창 밖으로는 현무암을 이용한 작은 연못과 정원이 (일본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6개의 다도실이 각각 너무나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어서 나는 그 공간만으로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마침 사람이 없어선지 우리는 정원을 통해 저수지가 모두 바라보이는 가장 아름다운 방으로 안내 받았다.

동적명상을 진행했던 선생님이 친절하게 다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차 우리고 마시는 법을 설명해주었다.

참고로 리조트 객실에는 모두 다기세트가 하나씩 구비되어 있고 제주 녹차를 마실 수 있도록 준비돼있다.

9번 덖어낸 흑차를 선택했는데 맛과 향이 정말 절묘하고 구수하더라.

게다가 비가 억수같이 오는 바깥 풍경이 차를 내리기에 얼마나 잘 어울리던지. 맑은 날과는 다른 정취가 있었다.

다도는 어딘지 따뜻하고 정적인 행위인데 그래서인지 악천후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바깥의 차가운 기후와 차단되어 따뜻하고 단정한 내부공간과의 대비가 참으로 좋았다.

정말이지 너무나 속상했을뻔한 이 날씨와 여행을 숙소가 살려주었다. 천천히 차를 다 마시고 공간을 충분히 즐기다가 나오니 뭔가 몸도 마음도 정리된 기분이었다. 더 이상 이 날씨에 여기서 내가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공간과 체험이 날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방으로 돌아와 책을 읽다가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저녁은 가까운 곳에 보말로 유명하다는 해월정으로 갔다. 차로 십분거리라 빗속에도 부담이 없었다.

맛있는 녀석들에 출연한 이후 손님이 폭발했는지 아예 같은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세웠다. 비오는 밤인데도 이곳은 손님이 꽤 있었다. 우린 성게 보말 칼국수를 먹었다.

역시 제주의 맛은 이건가. 남편은 어제 일통이반, 순이네, 조식까지 세끼 연타로 성게를 먹었는데 그래도 맛있다고 감탄 연발이었다. 그런데 이 국물은 나도 너무 좋아서 거의 다 먹었다. 특별한 건 아닌데 그냥 진하게 제대로 낸 해물육수. 보말과 성게를 넣어 가미된 바다향기. 이게 참 제주도에서 먹기 좋은, 부담 없고 맛있는 음식이구나 싶었다. 이젠 푸짐한 모듬 해산물에 대한 미련도 없다. 다행히 이번 여행은 식당들은 다 괜찮았다.

먹고 나니 비도 그쳐 있었다. 

리조트로 돌아와 차를 세우고 소화 겸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밤바다는 언제나 그렇듯 영원처럼 멀리 찰싹찰싹 물결 쳤다. 해안선을 따라 리조트의 불빛들이 깜박거리고 그러나 가로등은 그리 과하지 않아 정말 먼 시골마을에 온것처럼 한적하고 바다냄새와 풀냄새가 함께 났다. 우도인지 어딘지 모를 바다 건너 봉우리에선 등대의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휙 우리를 스치며 돌아갔다.

비가 쏟아지고 난 후의 공기는 상쾌했다. 어둠속을 조용히 산책하고 돌아오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우리는 7시 명상 코스도 들어보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입소문 나면 여기도 분명 예약하기 어렵겠지.

무슨 섭리였는지 이번에 여길 알게 된게 천만 다행이었다. 비가 왔기 때문에 더 좋았던 프로그램들. 내일은 오늘보다는 더 맑은 날씨일거 같으니 아마도 끝으로 갈수록 더욱 좋아지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글이 대체 왜 이리 인기인가 하며 의아했었는데 방금 1층에서 가져온 도쿄기담집을 읽으니 이건 술술 잘 읽힌다. 이 시대가 아무리 인간성을 상실하고 황폐해져 가는 시대라 하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조금이라도 일상적이고 리얼하고 사람들의 삶에 관한 조근조근한 이야기가 나에겐 필요하다.

제목은 귀신 얘기 모음인거 같았지만 읽어보니 괜찮다.

오늘은 이걸 마저 다 읽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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