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안의 캐비닛

<소설> 그가 돌아오지 않기 바라는 그녀들

by 은주

“그러니까 오늘 같이 보러 오는 한국인이 요즘 리처드와 친하게 지낸다는 거죠?”

세연이 물었다. 애자는 그 말을 뒷받침해 주듯 유진에 대한 정보를 줄줄이 이야기했다.

“유진 씨는 런던에서 회계사로 일하다가 정년퇴직했데. 결혼은 했는데 따로 떨어져서 사는 것 같아. 헤어진 건 아니고 주말마다 신랑이 오는 거 보면 주말 부부인듯해. 바닷가 근처 집이 좀 비싸? 그걸 현금으로 산 걸 보면 신랑네 집이 좀 사는 것 같아. 리처드가 돈 있는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려고 하잖아.”


세연은 생각에 잠겼다. 캐서린이 언니가 아닌 것까지는 밝혔지만 언니가 아직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밝혀낼 수 없었다. 가짜 캐서린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건 무엇일까? 고민은 하고 있는데 곰돌이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커피숍으로 들어왔다. 짧은 파마머리에 긴 앞머리가 흘러내리는 듯 옆으로 상아색 핀을 꽂았는데 촌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누군가를 찾듯이 두리번거리다 애자 언니를 보자 미소를 지으며 한달음에 테이블로 왔다.

“언니, 잘 냈어요?”

“유진 씨도 잘 지냈어?” 약간 뜸을 들이다가 애자가 세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가 예전에 말한 독서 모임 같이 하고 싶다는 친구야. 플리머스 대학에서 범죄 심리학을 가르치는 강세연 씨라고 해”

“어머 반가워요. 대학에서 강의하신다니 너무 멋져요. 우리나라 말도 아니고 영어로 강의하시다니 진짜 대단하세요.”

또 다른 한국인을 만난 게 반가워서 유진은 손을 잡으려고 했다. 세연은 어색한지 손을 약간 뒤로 뺐다가 너무 인색해 보이나 싶어 손을 마주 잡았다.


“유진 씨는 글을 쓴다고 들었어요”

“작가 지망생이에요, 정년퇴직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렵더라고요.”

그렇게 셋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책을 읽고 나누는 독서 모임을 하기로 약속했다.

“아 참, 바닷가 주변의 집을 알아보고 있는데 그 근처 사신다고 들었어요”

무언가 생각난 듯 세연이 말을 꺼냈다.

“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 풍경이 너무 좋아요. 특히 해 질 녘이 너무 예뻐요. 우리 집 근처 집들은 리처드 씨 회사에서 판매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관심 있으면 소개해 줄까요?”

“너무 좋죠. 혹시 그분 전화번호나 사무실 주소를 알 수 있을까요?”

“직접 판매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누가 구입했는지 궁금해하기는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집 정원도 와서 살펴봤어요.”

유진은 휴대전화에서 번호를 찾다가 갑자기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세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제가 약속을 좀 잡아 볼게요. 리처드 씨는 매일 아침 바닷가를 달리는데 가끔 마주치거든요”

세연은 집을 이사할 계획은 없었지만, 집 계약을 핑계로 리처드를 소개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자연스러운 만남이 성사된 것은 다행이었다. 언니를 찾는 것에 한 발짝 다가간 듯했다.


리처드는 부자가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애자 언니의 조언을 듣고 언니에게서 샤넬 가방을 빌리고 에르메스 스카프와 부츠까지 신으니 돈 있어 보이는 졸부의 느낌이 났다.

‘됐어. 깐깐해 보이지 않고 쉬어 보이지도 않을 정도면 돼’

세연은 로비의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서자, 키가 180은 훌쩍 넘어 보이고, 양복에 포켓치프까지 넣어 입은 훤칠한 영국 남자가 앉아 있었다.

“반갑습니다. 유진 씨는 같이 안 오셨나요?”

“여기서 바로 만나기로 했어요”

"어떤 종류의 집을 찾으시죠? 제가 직접 상담하지는 않지만 유진 씨 소개니까 특별히 안내해 드리죠."

리처드는 생각보다 더 젊어 보였다. 머리숱도 많았고 흰머리는 중년의 중후함이 느껴졌다. 눈웃음을 치며 미소 지을 때면 ‘언니가 저 모습에 반했겠구나’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오늘의 용건은 집이 아니었기에 안내서를 받아 대충 훑어보았다.

“사업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어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음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은 거라. 25년인가? 그쯤 되었겠네요.”

“저도 부모님이 최근에 돌아가셔서 유산을 좀 상속받게 되었어요.” 세연은 사실과 거짓을 섞어서 이야기했다. 리처드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불로소득이라. 모든 이들의 꿈이죠”

세연은 무언가 은밀한 제안을 하듯 그의 왼손을 슬쩍 쳐다보았다. 반지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캐서린과 혼인 관계임을 알고 있었다.

“아 별거 중이에요.” 그녀의 눈빛을 느꼈는지 리처드가 불쑥 이야기했다.

세연이 조용히 아무 말도 없자 말을 이었다. “혹시 궁금하실까 봐”

“결혼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아이는 있나요?” 너무 개인적인 것을 물어봤나 싶었지만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에게 관심이 있는 듯 눈웃음을 짓자, 리처드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했다.


“26년 되었어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으려면 결혼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한 거죠. 그냥 뭐 정해진 결혼이라고 해두죠. 그러니 아이는 당연히 없고..,”

그녀는 그의 거짓말을 그냥 들었다. 이런 허접한 인간과 언니가 결혼한 것이 분하기도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지금은 참는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유진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둘이 만들었던 무거운 공기가 유진의 에너지로 밝아졌다. 리처드가 책상에서 무언가 꺼내려 열쇠를 찾아 캐비닛을 열자, 그 안에 또 다른 캐비닛이 나왔다. 세연은 사무실을 둘러보는 척 그곳을 유심을 쳐다보았다.

‘캐비닛 안에 캐비닛이라... 저 안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들어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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