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가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그녀들
캐서린의 50 생일날.
리처드는 서재 의자에 등을 기대고 책상 위로 다리를 올린 채 휘파람을 불었다. 드디어 오늘, 유진의 남편 이안에게서 투자를 진행하겠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화면에 떠 있는 짧은 문장을 보는 순간, 그의 입가에는 오랜만에 진짜 웃음이 번졌다. 남작 부인을 협박해 받아낼 돈까지 손에 넣으면, 그는 미련 없이 저지 아일랜드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동안 목을 조이던 채권들은 모두 캐서린의 이름으로 돌려두었다. 법적으로는 이제 그녀의 빚이었고, 그는 자유였다. 문제는 캐서린 명의로 위조해 둔 서류들이었다.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계산하던 찰나, 서랍 옆 모서리에 찍힌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미세했지만 분명했다. 누군가 억지로 서랍을 연 흔적이었다.
“캐서린!”
그의 목소리가 서재를 갈랐다.
캐서린은 두려움이 고인 눈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평소 갈색이던 그의 눈이 분노와 함께 푸른빛으로 변해 있었다.
“당신 서재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서재 근처엔 얼씬도 안 했어요.”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숨긴 채 말했다.
“누군가 들어왔어. 요즘 한국 여자들이랑 어울리더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그 사람들을 끌어들인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잖아요. 유진 씨도, 남작 부인도, 애자도 전부 당신 사업 때문에 만난 사람들 아닌가요?.”
리처드는 대답 대신 CCTV 모니터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화면을 역순으로 돌려보던 그의 손이 멈췄다. 이주 전, 애자와 지은, 그리고 세연이 집에 들어오는 장면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며 서재로 향하는 지은의 모습도 담겨 있었다. 캐서린은 모니터 앞에 안절부절못한 채 공포스러운 눈으로 그의 눈을 피했다.
주먹이 날아왔다. 이유를 묻지도, 변명할 기회도 없었다. 그가 없을 때 집에 누군가를 들인 게 무엇이 잘 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뒤에도 화를 주체 못 하는 그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알아?”
캐서린의 공포스러운 얼굴 위로 과거의 장면들이 겹쳐 보였다. 쓰러져 있던 애정을 바라보다가 죽이기로 결심했던 순간. 냉동실, 그리고 신혼여행을 가장한 다트무어로 향하던 차 안. 캐서린은 수면제에 취해 있었고, 강애정이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믿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했을지 모른다.
“오늘은 당신 생일이니까 이쯤에서 끝내지.”
그는 낮게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계획을 망치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알게 될 거야.”
“강 사장님처럼요? 강애정 사장님처럼 저를 죽일 건가요?”
리처드는 순간 굳어버렸다. 한 번도 말댓구하지 않았던 캐서린 입에서 26년 전 죽은 여자의 이름이 나왔다.
“내가 왜 그녀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난… 죽이지 않았어.”
“세연 씨가 누구라고 생각해요? 강 사장님 동생이에요. 언니를 찾으러 영국에 온 거예요. 늦었지만, 진실은 꼭 밝혀질 거예요.”
리처드는 순간 멈칫했다.
‘그래 애정에게 나이 차이가 크게 나던 늦둥이 동생이 있었어.’
애정의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라 집에 들어오지 못했던 때가 많아 외동으로 컸다는 말을 했던 게 기억났다. 그러다 갑자기 생긴 동생이라고 많이 예뻐했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선물을 같이 고르기도 했지 ‘ 왜 낯이 익었는지 이제야 이해됐다.
캐서린의 머릿속에도 한 장면이 떠올랐다. 신혼여행 중이던 그 밤, 이유 없이 쏟아지던 졸음, 트렁크를 열던 그의 뒷모습. 쓰레기를 버리는 줄로만 여겼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후 네 시쯤 시작된 파티는 샴페인의 거품이 꺼지듯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수영장 위에 늘어진 조명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음악도 느려졌다. 지은은 리처드를 마주할 생각에 손끝이 떨렸다. 손바닥엔 식은땀이 맺혔다.
리처드는 돈을 현금으로 준비해 달라고 했다. 그의 금전 요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걸 지은은 알고 있었다. 세연은 수영장 안쪽, 불이 꺼진 사우나 안에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다.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대화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쥐새끼처럼 집을 잘도 뒤지고 다녔더군. 내가 못 알아챌 줄 알았나?”
리처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제 서류는 없더군요. 그래도 아주 흥미로운 서류들을 발견했죠. 바쁜 삶을 살았더군요.” 지은은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서류 위조에 재능이 있던데요. 양아버지의 변호사까지 감쪽같이 속일 정도로 정교했어요.”
리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엇을 봤는지 모르지만, 그걸로 날 협박할 수는 없어.”
“증거가 없다고 생각하나요?” 지은은 한 발짝 다가섰다. “협상을 다시 하죠. 제 서류는 어디 있죠?”
“당신은 찾을 수 없어. 내가 들고 나왔을 거라 생각하나?”
그의 비웃음에 지은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면 돈을 드릴 수 없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지은이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유진 씨 아는 사람이 BBC 피디더군요. 제가 찍은 사진을… 그녀가 꽤 흥미로워했어요.”
순간 리처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돌연 지은에게 달려들어 휴대폰을 낚아채려 했다. 그의 팔을 잡아 빼려는 순간 리처드의 한쪽 팔에 느슨하게 걸쳐있던 커프 링크스가 쨍그랑하고 떨어져 나갔다. 지은은 미리 준비해 둔 전기 충격기를 급히 핸드백에서 꺼내 리처드의 허리를 찔렀다. 자신의 서랍을 뒤졌다는 걸 알면 흥분한 리처드가 달려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적중했다. 짧은 파열음과 함께 리처드는 몸을 떨며 그대로 수영장으로 쓰러졌다. 물이 크게 튀었다. 물 튀는 소리에 사우나 안에 숨어 있던 세연이 달려 나왔다. 세연을 찾아다니던 캐서린도 수영장 근처에서 얼어붙은 지은을 발견했다. 리처드는 물에 빠져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순간 캐서린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하기보다는 리처드가 이대로 사라지기를 바랐다. 캐서린은 망설임 없이 수영장 덮개 버튼을 눌렀다. 기계음과 함께 덮개가 천천히 닫히며 물 위를 봉인했다. 리처드가 깨어나더라도, 밖으로 나올 수 없도록. 그리고 정전을 핑계로 늦게까지 남아 있던 손님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모든 전기 스위치를 차단했다.
몇 시간 뒤, 지은은 비서에게 조용히 리처드의 요트를 몰고 다트무어 인근에 정박해 달라고 부탁했다. 흔적은 바다에 남기고, 진실은 어둠 속에 묻기 위해.
지은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