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 윈저
요즘 인기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며, 엄마와 함께한 수많은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부족한 글 솜씨로는 마음에 남아있는 이야기를 다 담아낼 수 없었다. 나는 영국에서 17년을 살았고 한국에서 24년을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와 함께한 9년은 딸이자 남편이자 친구로서 살아낸 시간이었다. 인생이 늘 그렇듯, 엄마와의 시간은 좋을 때도 있었지만 화나고 눈물 나는 일도 많았다. 엄마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 지금은 그 모든 기억을 지나 연민과 고마움만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
80대 엄마는 영국에 있는 나를 만나기 위해 왕복 26시간의 비행을 일곱 차례나 감행했다. 마지막 방문은 4년 전 8월 막내딸 결혼식을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엄마는 86세였고, 걷기조차 힘들어했다.
내가 처음 윈저(Windsor)로 이사했을 때, 지역 이름을 여러 번 되물으셨다.
“런던은 아는데 네가 사는 지역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
수첩에 적어 두었는지만 막상 누가 물어보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엄마, 숙자, 미자처럼 윈자로 외워봐”
내가 알려드리자 금세 외웠고 그 뒤로는 지역명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실 거주지인 윈저성(Windsor Castle) 근처에 살고 있다. 런던 중심부에서 약 20마일 떨어져 있고 기차로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당일치기 여행지로 인기가 많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생전에 가장 애정했던 거처 중 하나였고, 2022년 돌아가신 후 이곳에 안장되었다.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의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던 장소이다. 엄마와 윈저성 안을 함께 구경하였을 때 여왕은 아직 생존해 있었다.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공간은 ‘왕실 인형의 집 (Queen Mary’s Dolls’ House)‘이었다.
“그때도 저런 비단옷을 입고 다녔데? 저런 식기를 썼구나. 보전도 잘되었네”
정교하게 전시된 여왕의 옷이나 궁중 식기를 한참을 들여다봤다.
“저 찻잔으로 커피 한 잔 마셔보고 싶다”
조심스럽게 내뱉은 말속엔 약간의 부러움이 묻어 있었다.
엄마보다 아홉 살 많던 ‘엘리자베스 여왕 언니’의 삶이 살짝 부럽기도 하셨던 걸까.
엄마의 젊은 시절의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고, 영국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였으니, 삶의 형태도 많이 달랐으리라. 엄마를 위로하려
“여왕의 아들은 바람도 피우고, 다른 아들은 미국에서 좋지 않은 일로 화제가 됐고, 이런저런 소문들이 많았어.”
라며 가십들을 전해드렸더니, 엄마의 얼굴에서 살짝 부러움이 희미해진다.
“여왕의 삶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구나.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게, 어떨 땐 더 남부끄러운 일이 될 수도 있지.”
엄마는 가끔 명언 같은 말을 툭툭 던진다.
이번 방문은 이탈리아를 다녀온 뒤 여섯 번째 영국 방문이었다.
“내년 결혼식 때 또 보자.”
라며 작별 인사를 했지만, 예상치 못한 코로나로 영국 전역에 봉쇄령이 내려졌고, 결혼식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엄마와 함께한 시간은 단순히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의 내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내가 <폭싹 속았수다>를 보며 눈물 흘렸던 건, 엄마의 사랑과 지혜가 내 삶 깊숙이 스며 있었다는 걸 새삼스레 느꼈기 때문이리라.
“덕을 쌓고 살아라”는 극 중 대사가 마음을 울린 것도, 엄마가 평생 쌓아온 그 덕이 나에게 행운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