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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ah Choi Dec 01. 2022

동생이 아니었으면 지가 이 땅에 올 수나 있었겠어요?

자폐 동생을 돌보는 D의 이야기

 “아니, 선생님! 막말로 말입니다! 지가 어디! 동생 아니면 한국 땅에 발이나 붙였겠냐고요! 안 그렇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격양된 D 아버지의 말을 믿을 수 없어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린 시선 끝에 식탁에서 블록 놀이를 하는 딸아이가 걸렸다. 무언가 잘 안 되는 듯 입을 앙다문 채 모서리가 맞지 않는 블록을 여기저기에 대보며 힘을 쓰고 있었다. 실패, 또 실패. 이윽고 한쪽 끝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나에게 눈썹을 찡그리며 구원의 손길을 구했다.

 “선생님! 저는 다른 건 참아도 말입니다, 그짓말하는 건 못 참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원래 그러는 건지, 제가 오죽 답답하면 선생님께 전화를…….”

 인내심이 바닥난 딸아이가 보채듯 팔을 낚아채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수화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수화기를 얼른 들어 통화를 급히 마무리했다. 결론은 내일 수업 때 D와 잘 말해보겠노라. 아버님도 노여움을 푸시고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조금 누그러진 D 아버지도 그제야 전보다 차분해진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통화를 마쳤다.

 대체 D가 왜 그랬을까. 아이가 손에 쥐어 준 블록을 들고 이리저리 아귀를 찾아 끼우면서도 의문은 여전했다. 그때, D 아버지의 말이 먹물처럼 머릿속에 끼얹어졌다.


 “동생이 아니었으면 지가 이 땅에 올 수나 있었겠어요?”   

  


 까무잡잡한 피부, 넓죽한 코, 쌍꺼풀이 짙은 눈이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아이였다. 왜소하고 구부정한 어깨로 책상 한편을 차지하고 앉았을 때 내가 D의 모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D는 수줍은 듯 피식 웃었던 것 같은데 끝내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D는 단박에 나를 믿었다.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수업 시간에 내가 손짓으로 쓰라면 연필을 꺼내어 투박한 필체로 흉내 내듯 한글을 썼고, 입을 벙긋대는 시늉을 하면 내 입 모양을 따라 말했다. 의심은 없었다. 왜라는 의문 따위도 품지 않고 처음 본 순간부터 나를 믿어버렸다. 나에 대한 선의나 호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체념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쩔 도리 없음'

 아이들은 대체로 자의에 의해서 한국에 오는 경우는 없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십 년 이상의 세월 동안 친모와 떨어져 본국에 홀로 남겨져 생활하게 된다. 본국에서의 친부모의 이혼, 사별이 가장 흔한 경우라 이런 경우 친모가 한국에 취업이나 재혼 등을 이유로 떠나가게 되고 아이는 친척집이나 조부모, 혹은 친부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다 모종의 이유로 한국에 오게 되는데 대부분의 아이들, 특히 사춘기 남아의 경우 낯선 외국, 이미 낯설어진 엄마와의 재회가 반갑지만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구원은 애석하게도 부모이기에 그 생경하고 두렵고 불편한 모든 것들을 감수하고 여기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지 못할 외국인 선생의 이상한 행동을 따라 해 주는 것이다. 어쩔 도리가 없기에.

 그런 의미에서 열다섯 짜리 사춘기 소년 D는 충분히 많은 애를 써 주었던 것이다.


 센터의 수업은 오후 한 시부터 시작된다. 끝나는 시간은 보통 다섯 시인데 특별활동이나 아이들 사정에 따라 유동적으로 조정되기도 한다. 국경일, 공휴일, 센터 직원들의 워크숍이나 지자체 행사 등에 영향을 받기도 해서 쉬는 날이 급작스럽게 생기기도 한다.

 D는 대부분의 수업 시간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가기 일쑤였다. 집에는 일곱 살짜리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자폐증을 앓고 있고 전해 들은 바로는 정도가 조금 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D는 아침에는 동생의 식사와 등원을 전담하고 오후에 센터 수업을 나와 수업을 듣다가 두 시 반쯤이 되면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바로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한 D는 집 앞에 도착한 동생의 하원 버스를 기다려 동생을 맞아 집으로 데리고 간 후 간단한 간식을 먹이고 동생의 방문교사를 맞이하고 방문교사가 돌아간 후 동생의 저녁을 챙긴다.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는 아홉 시까지 집을 청소하고 설거지, 빨래 등을 한 후 핸드폰 게임을 하다 잠이 든다.

 그날도 D는 어김없이 두 시 반이 되자 불에 덴 듯 놀라 '선생님'을 외친 후 버스를 타러 교실을 떠났다. 우리는 으레 있던 일이었기에 D를 보낸 후에도 여느 때처럼 수업을 계속했고 그렇게 그날의 수업을 마쳤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때 D의 아버지에게 전화가 온 것이었다.

 D는 그날 바로 집으로 가지 않았다. 동생은 하원한 후 홀로 한참을 서 있다가 연락을 받은 아버지가 놀라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D는 동생의 하원을 늦게 맞거나 오늘처럼 건너뛰는 일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동생은 자폐 외에 다른 장애도 가지고 있어서 혼자 밥을 먹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처럼 밥을 잘 챙겨 먹여야 하는데 그걸 D가 잘해주지 않아 영양실조가 생길 정도로 말라간다고 했다. 교실 속 우리 아이들과 달리 나는 D 아버지에게 수많은 왜를 묻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질문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날 몇 달 전의 모습보다 밝지만 눈에 띄게 산만해진, 그러나 어제보다는 풀이 죽은 듯 보이는 D와 마주했다. D는 부러 내게 씩씩한 척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도 한시도 제 몸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다리를 건들건들거리지 않으면 손을 움찔움찔했다. 어딘가 고장 난 기계 같아 보였다. 나는 그런 D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손을 들어 장난스럽게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농담만 건넸다.      

 동생을 돌보는 역할이 필요한 게 아니었으면 감히 올 수도 없는 나라였을까? D의 까만 눈동자가 산만하게 부딪히는 그 공간이 턱없이 좁게 느껴졌다. 후에 통역 선생님을 통해 D가 동생을 챙기지 않고 사라진 곳이 어딘지 들었다.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수업이 끝나고 센터를 빠져나오니 D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었다. 센터  버스 정류장이었다.




*다문화센터에서 중도입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실제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수기를 작성했습니다. 실제 내용을 기반으로 했으나 등장인물이나 신원을 특정할  있는 부분은 임의로 각색하였음을 밝힙니다. 중도입국청소년을 이해하는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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