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요?
A가 수업을 하던 해에는 지금과 달리 센터에서 오전부터 오후까지 한국어 수업을 진행하던 때였다. 오전 3교시 수업을 마친 후 아이들은 센터 건물 1층에 이주여성이 운영하고 있는 식당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고 각자 강당에서든 교실에서든 시간을 보낸 후 다시 오후 수업을 시작했다. 아침부터 오후 서너 시까지 이어지는 수업에 아이들은 센터에서 제공하는 점심 식사 외에도 스스로 센터 매점에서 간식을 사 먹곤 했었다.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이니 컵라면과 콜라 같은 자극적이고 칼로리가 높은 음식들이 인기가 많았다.
A는 당시 수업을 하던 아이들 중에서 10살로 나이가 가장 어린 편에 속했다. 나이는 10살이었지만 실제로는 8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깡마르고 작은 체구의 남자아이였다. 큰 눈과 길고 숱이 많이 속눈썹, 오똑한 코가 한껏 이국적이어 보이던 A는 그 나이 남자아이가 그렇듯 엄청난 개구쟁이였다. 뛰는 속도는 어찌나 빠르고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A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 교실 안에 아이들이 귀를 막을 정도였고 나는 항상 A에게 검지손가락을 내 입술에 대어 보이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여야 했다. 당시 교실 안 책상 배열을 동그랗게 한 적이 있었다. 교사인 나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앉아 서로의 얼굴을 보며 회화 연습을 했었는데 다른 아이들과 A가 붙으면 항상 트러블이 일어나 어쩔 수 없이 A는 내 옆에 고정석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 나는 한동안 편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수업이 진행되는 50분 동안 A는 나를 50번 이상 불렀고 바로 옆임에도 불구하고 옆 교실에서 부르는 소리와 비슷한 크기로 불러대니 신경성 두통이 생길 정도였다. 아이들이 제발 작게 말하라고 귀를 틀어막고 짜증을 부리는 대도 A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내가 다른 아이들의 말을 듣는 와중에 자신에게 대답하지 않으면 내 팔을 쥐고 흔들기도 했다. A도 답답한 마음이 있을 텐데 애석하게도 센터에는 A가 사용하는 언어를 통역해 줄 선생님이 있지 않았다. 아주 가끔 영어가 가능한 아빠와 문자 메시지가 가능할 뿐이었다. 엄마는 집에서 A를 제외한 어린 삼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A는 점심에 유일하게 식사를 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인데 왜 식사를 하지 않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면 애써 고개를 돌려 ‘낫 헝그리’라고 짧게 말하고 또 와다다다 뛰어 그 자리를 피해버리곤 했었다. 그러다 형, 누나들이 매점에서 초코바나 과자를 들고 교실로 올라오면 그 옆을 떠나지 못하고 한참 넋을 놓고 쳐다만 봤다. 몇 날 며칠을 보다 못한 내가 A 아버지에게 ‘A가 점심에 식사를 하지 않는데 아이인지라 배가 고플 것 같으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시거나 혹시 종교적인 문제가 있으시면 가정에서 도시락을 준비해서 보내 주시’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여전히 밥을 먹지 않던 A가 어느 날 내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나는 드디어 도시락을 싸 왔구나 박수를 치며 A가 도시락 꺼내는 모습을 봐줬다. 비닐봉지에 조악하게 싸여있던 철제 도시락이 덜거덕 거리더니 기름진 국물이 살짝 새어 나왔다. 뚜껑을 여니 쇠 포크 하나가 툭 하나 떨어져 나왔는데 다 불어 터지고 끊어진 스파게티 면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쉰내가 훅 끼쳐왔다. 나는 확신하지 못하고 다른 선생님을 불러와 음식을 보게 했고 그 선생님 역시 상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꾸역꾸역 먹고 있는 A를 막을 수 있는 지혜가 떠오르지 않았다. 난감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뒤에 정확히 어떻게 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뒤에 다시 도시락을 싸 오지 않은 건 확실했다. 내가 다시 A에게 왜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제야 A가 말했다.
“아빠 안 돼요. 돼지고기 안 돼요.”
“A 배고파요. 어떻게 해요?”
“몰라요….”
A의 아버지는 일 때문에 다른 지역을 오가느라 연락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이의 상황 자체를 잘 알지 못해서 이야기가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연락처도 없고 영어도 불가능해 소통이 어려웠다. 센터의 다른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에게 상한 음식을 먹일 수도, 굶길 수도, 그렇다고 부모를 속이고 아무 음식이나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A에게 물어보고 식당에서 흰쌀밥만 먹는 건 어떠냐고 물어보니 A가 좋다고 했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던 A도 차차 돼지고기가 없는 음식들을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먹성 좋은 A는 흰쌀밥을 몇 번이나 되담아 먹기도 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A가 식당에 가지 않게 되었다. 시무룩해진 A가 책상에 엎드려 아빠가 먹지 말라고 했다면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말없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 A는 종종 학교가 끝나고도 소리를 지르며 센터에 오곤 했는데 올 때마다 같은 반 친구를 하나씩 달고 오기도 하고 머리에 땀을 잔뜩 적셔 오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인싸가 된 모양이구나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반대로 센터 사무실 선생님은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는데 하루에 한 번씩 A의 담임 선생님, A 동생 어린이집 등에서 전화가 온다는 것이었다. A의 담임 선생님은 A가 수업 시간에 소리를 지르면서 선생님을 너무 많이 부르는 통에 수업이 진행이 되지 않는데 센터에서도 그랬느냐 등의 이야기였고, A 동생 어린이집은 기본적인 수업료를 너무 많이 밀리고 소통도 안 되는 등의 이런저런 고충이 있다는 이유였다. 센터 선생님이라고 어떤 해결책이 있었을까?
이후 오며 가며 공원에서 놀고 있는 A의 모습을 본 적도 있고, 센터 선생님을 통해 학교 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소식도 듣고, 워낙 총명한 아이라 한국어가 많이 는 모습도 보았는데 언젠가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뉴스를 통해 가끔 접하는 A의 고향은 불안한 치안,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늘 뉴스에 배급소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곳 아이들의 기사 사진이 있었다. A의 생각이 많이 난다.
*다문화센터에서 중도입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실제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수기를 작성했습니다. 실제 내용을 기반으로 했으나 등장인물이나 신원을 특정할 수 있는 부분은 임의로 각색하였음을 밝힙니다. 중도입국청소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중도입국청소년 #다문화센터 #한국어강사 #한국어수업 #한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