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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May 30. 2024

5월의 밑줄(2/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05월 13일 월요일


온라인 서점은 이미 내가 아는 책을 검색하기 때문에 모르는 책을 발견할 수가 없죠. (…) 그러니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는 거예요.

_ 정희진, <정희진의 공부> 팟캐스트 중에서


아무 생각 없이 서점으로 들어가서 딱 두 시간만 내가 모른다는 사실도 몰랐던 세계를 만나고 싶어요. 팟캐스트를 듣다가 얼마나 오랫동안 서점에 가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어요. 알라딘 플래티넘 회원이 되면서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네요.

05월 14일 화요일  


아이들이 주어를 남으로 설정한 뒤 큰따옴표를 쓰는 순간을 나는 눈여겨보게 된다. 그건 다른 사람의 말을 거의 외워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_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70-71쪽


이 문장을 읽고 미리 님이 떠올랐다. 그녀의 글에는 큰따옴표가 많다. 리추얼을 하며 그녀의 글을 1.5년 동안 따라 읽으니, 이제 그녀의 글은 음성지원이 된다. 주요 등장인물(남편, 큰 딸, 작은 딸, 엄마, 남동생 등)은 내겐 글 안에만 있는 사람들이지만 큰따옴표를 단 생생한 말을 자꾸 읽으니, 목소리가 생겼다.

큰따옴표가 많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거의 외워야 가능한 것이구나. 큰 노력이 드는 일이구나. 미쳐 몰랐다.

아이처럼 엉뚱하고 티 없이 밝아만 보이는 미리 님. 동시에 인생 대여섯 번 살아 본 할머니처럼 속 깊고 깊은 말을 해서, 속 깊고 깊은 메시지가 담긴 글을 써서 자꾸 놀라게 된다. 그 비결이 궁금했다. 어쩌면 이게 아닐까, 큰따옴표로 글 전체를 채울 수 있을 만큼 타인에 대한 관심을 켤 수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이라서. 큰따옴표가 가득한 글은 사랑이 가득한 글이라는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05월 15일 수요일


누군가 나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아. “아파서요. 책을 읽으면 좀 덜 아프거든요.” 이는 나만의 이유가 아니다. 누구나 몸이 아프거나 기분이 상할 때 혹은 고통으로 인한 죽음 직전에도 책을 읽으면 위로받는다. 기분이 전환되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픈 상황에서 딴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덜 아프게 된다. (..) 이 위로가 몸에 습관이 되어 독서의 즐거움에 중독되면 다른 일에는 흥미가 떨어진다.

_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9쪽


1. 읽기 예찬으로 시작하는 아침. 날씨가 좋다는 핑계로 읽는 생활에 힘을 못 내고 있었는데 다시 책 사랑이 뽀글뽀글 올라온다.

2.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요새 책을 그렇게 열심히 찾지 않는 것은 아프지 않기 때문일까?

05월 16일 목요일


가장 어려운 우정은 자기 자신과의 우정일지도 모른다.

_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82쪽


40대 여성이 되고 가장 좋은 점. 나와 훨씬 좋은 우정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요. 다른 것도 그렇지만, 특히 제 몸과 그래요. 보이는 몸 vs 기능하는 몸의 싸움에서 절대적으로 보이는 몸의 편을 들어줬어요. 그러니 우리나라 L 사이즈가 꽉 끼는 체격인 제가 거울 앞에서의 얼마나 오랫동안 좌절과 부끄러움을 느꼈겠어요. 하지만 이제는 기능하는 몸의 위상이 훨씬 높아요. 수영반 C회원보다 접영을 더 빠르게 하고, 돌까지는 모유 수유를 하고, 아기를 등에 업고 북한산 정상에 가는(이건 꿈입니다) 것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보다 훨씬 중요해요. 아무래도 만 42세에 첫 출산을 하면서 이런 생각의 전환에 크게 영향을 주긴 한 것 같습니다. 50대, 60대, 70대 여성이 되었을 때 나와의 (내 몸과의) 우정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네오.

05월 17일 금요일


나는 네가 구몬을 밀려보길 바래. 나는 네가 그걸 하루만에 할 수 있다는 걸 일찍 깨닫길 바래. 게으름의 즐거움을 미리 알아놓는 것은 너를 정말 행복하게 해줄테니까.

_허예련(여수글방)

_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131쪽


열다섯 살 허예련의 글이 너무 좋아서 두 번 읽고 이 문장을 메모했어요. 내가 나로 다시 태어났다면 가정하고 건네줄 인생 설명서를 적어 보는 글 중 일부예요.

어릴 때 구몬 안 밀려봤던 아이로서 이 문장에 공감해요. 게으름의 즐거움을 너무 늦게 알게 된 어른으로서 이 문장에 또 공감해요.

성실함의 과소평가 됨에 대해 며칠 전 글에 말했는데요. 오늘은 누가 뭐래도 게으름을 예찬하고 싶어요. 제가 두 개로 쪼개지는 느낌이에요. 하지만 박완서 선생님이 그러셨죠. 인간에게 이중성, 삼중성이 있다고. 그래서 문학이 있다고.* 분명히 제가 저에게 성실하게 살라고 말했는데, 오늘은 게으름의 즐거움은 어쩔 거냐고 말하고 있네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만 문학이 있는 거 아니에요? 다른 동물에게는 이중성, 삼중성이 없으니까.

_ 박완서, <박완서의 말>, 334쪽

05월 18일 토요일


우리 사이에 쾌락은 있었지만 기쁨은 없었다. 쾌락은 자꾸 탐하면 물리게 돼 있다.

_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192쪽


쾌락과 기쁨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구분을 잘 못하고 있어서 가장 최근의 쾌락과 기쁨을 떠올리며 단어 공부를 해봅니다.

1. 쾌락: 어젯밤 10시에 도리토스와 포카칩을 먹었어요.

2. 기쁨: 한국을 방문한 시댁 어르신들과 제주도 여행 중인데, 오늘은 혼자 가고 싶은 책방에 가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마음에 쏙 드는 바닷가 풍경을 바라보며 두 분이 손녀딸과 미소를 주고 받는 모습을 봤을 때. 기쁨이란 단어를 생각하니 이 장면이 떠오르네요.

쾌락과 기쁨, 어떤 장면이 떠오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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