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06월 03일 월요일
패배는 우리가 해야 하는 운동의 일부이다. (…) 진정한 운동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운동은 관념이며 헛깨비다.
_ 정찬, 소설 <완전한 영혼> 중에서
_ 정희진, 팟캐스트 <정희진의 공부> 2023년 3월호, 한 문장의 세계, <혁명은 역사가 패배자의 기록일 때 가능>
아빠와 갈등이 있었다. 열흘 전쯤 아빠가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오만 정이 다 떨어지는 말을 했다. 그에 지지 않는 데시벨로 소리 지르며 대응했다. 전화를 끊고 아빠와의 관계에서 걸어 나가겠다고 작심했다. 참을 만큼 참았다. 이걸로 끝이다, 라고 정리했다.
그게 10일 전이다. 10일이라는 시간은 이런 시간이구나. 마그마로 변해 펄펄 끓던 마음이 이제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식는 시간. 오전에 팟캐스트를 듣다가 분노로 활활 타던 마음을 꺼내서 들여다보았다. 내가 왜 그렇게 과민 반응했을까. 이제야 겨우 윤곽이 보인다. 아빠의 말이 내가 열등감으로 가진 부분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내 열등감인지도 몰랐다.
전혀 상관없는 맥락의 문장이었지만, 이 문장을 듣고 상황이 일순간 정리되었다. 지금 현실에 내가 아빠를 이길 수는 없다. 패배도 나의 일부다. 아니 이 문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혁명을 위해서라면 ‘해야 하는’ 것이다. 패배를 내 일부로 받아들이자. 패배를 용납하고 관념과 헛깨비에서 벗어나자.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빠에게 전화했다. 내일 점심 같이 먹자고. 나는 혁명을 이룰 수 있을까.
06월 04일 화요일
바쁠 망자는 마음 심에 망할 망자를 써요. 마음이 망한 거예요. 그래서 바쁘다는 말은 안 쓰는 게 좋아요. 일이 많다고 해요.
_ 유성호, <데맨톡>유튜브 중에서
바빠요? 마음이 망하진 않았나요?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봐야겠어요.
06월 05일 수요일
그들은 자신의 죽음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마지막은 빛났다. 눈을 감을 때 그들의 얼굴에는 한 치의 후회도 없었고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_ 오츠 슈이치,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57페이지
호스피스 전문의의 책을 읽고 있어요.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님의 추천으로요. 부검을 하면 죽은 사람과 함께 오는 유서도 자주 본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거기에 적힌 후회도 보고요. (삼프로티비 유성호 교수 인터뷰)
아직 저의 죽음(죽음의 일인칭)은 실감이 안 나지만, 가까운 주변인의 죽음(이인칭의 죽음)도 경험해 보질 못했지만, 죽음이라는 개념(삼인칭)을 적극적으로 인지하고 살고 싶어서 읽고 있어요. 솔직히 책에는 ‘지당하신 말씀’이 많습니다. 그 지당하신 말씀도 죽음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니 정곡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죽음은 정말 모든 것을 살아있게 만드네요.)
올해 8월이면 딸은 만으로 1살, 저는 43살이 됩니다. 적어도 딸이 40살이 될 때까지는 살고 싶습니다. 죽음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죽을 때 아쉽지만,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죽으면 당장 후회할 것들을 적어 보면 도움이 된다니 한번 해보려고요.
06월 06일 목요일
오래 살고 싶다. 좋은 글을 써보려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오래 살아야 될 것 같다. 적어도 천명을 안다는 50에서부터 60, 70, 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의 노경 속에서 오래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가을을 지나 농익은 능금처럼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 보고 싶은 것이다.
_ 이태준, <무서록>, 16쪽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1월인데 아직도 읽고 있어요. 잠 안 오는 한밤에 한 편씩 읽으니 딱 좋네요. 단숨에 읽는 책, 오래 두고 조금씩 진도 내는 책, 책마다 맞는 속력이 다른가 봅니다.
지난 인증 글에 딸이 40살이 될 때까지는 살고 싶다고 했는데요. 자라는 딸의 버전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솔직하게는 제 버전이 더 궁금합니다. 50세, 60세, 70세, 80세의 나는 과연 어떨지. 나이가 들어 과거를 어떤 시선으로 돌아볼지 정말 궁금해요.
박완서 님의 <그 남자의 집>을 읽고 있어서 더 그런가 봐요. 소설 주인공이 노년인 현재와 스무 살쯤의 기억을 번갈아 가며 이야기 해주거든요. 또 결론은 박완서 님이네요.
06월 07일 금요일
남이 쳐다보고 부러워하지 않는 비단옷과 보석이 무의미하듯이 남이 샘내지 않는 애인은 있으나마나 하지 않을까.
_ 박완서, <그 남자네 집>, 130쪽
감정의 겹을 잡아내는 박완서 샘.
애인이 있어서 참 좋다, 고 간단하게 끝낼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은 세상에 없을 거라고 말하는 듯, 그 마음에 꼬리를 단다. 남들이 쳐다보고 부러워하기 때문에 더 좋은 거라고.
나는 이런 감정에서 꽤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사는데, 이 문장이 질문한다. 정말? 전연 신경 안 쓴다고? 자유롭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