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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빠아아이이

감응의 글쓰기 4차시 과제

by 카후나


이불 밖으로 나오기 어려운 아침이었다. 딱 10분만 더 누워있고 싶은데, 곧 수영 강습 시간이다. 잠이 덜 깬 채로 수영 가방만 대충 챙겨 어두운 새벽으로 나섰다. 걸으며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열어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간밤에 나츠미가 남긴 DM이 있었다. 오랜만의 메시지가 반가워 바로 열어봤다.

“아빠(시게루)가 어제 돌아가셨어요. 홍콩 여행 중에요. 그동안 아빠랑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답장을 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준비운동으로 가벼운 자유형을 하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스캠은 아닐까? 링크가 없었으니 아닐 것 같은데. 그렇다면 시게루가, 정말? 무슨 일이었을까? 지병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볼 때마다 피곤해 하던 그의 충혈된 눈과 나츠미를 보던 딸바보 아빠 미소, 깐빠아아이이(건배)를 외치던 유쾌한 목소리가 뒤섞여 떠올랐다. 나츠미가 이제 겨우 스물다섯인데, 시게루는 고작 예순둘인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오늘 수업은 못하겠다고 말하려는데, 수영 선생님이 오늘 훈련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만 말하지 못하고, 대신 수영에 집중했다. 샤워장에서 머리도 못 말리고 나와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며, 오늘치 업무를 처리했다. 오후 4시가 되어 유치원에서 딸을 데리고 오려고 신발을 신는데, 오늘은 집중해서 책도 읽고 일도 많이 했네,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나츠미의 문자를 받고 이토록 차분하게 하루를 보낸 내가 괴물 같았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도 되는 걸까?” 저녁을 먹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이야기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남편이 일어나더니 와인을 가지고 왔다. “시게루가 와인을 좋아했으니 고인을 생각하며 한 잔 마시자.” 술 마시는 건 좋은 날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머뭇거리고 있는데, 남편이 와인 잔 세 개를 꺼내 가득 채우고, “시게루상, 와인 헤븐으로 가요.”라고 말했다. 내 잔을 받아 들고 시게루 잔에 “깐빠이”라고 말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늘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느꼈다.


이틀 후, 일본어를 잘하는 친구가 시게루의 일본 친구들에게 정황을 묻고 메시지를 남겨주었다. 홍콩에 친구들과 여행 갔다가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고통 없이 돌아가셨다고. 나에게는 정작 이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시게루가 떠난 사정을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고, 시게루의 죽음이 현실이 되었다. 스캠이 아니었다.



도쿄 롯폰기와 니시아자부 사이에 위치한 내추럴 와인바 겸 일식집 ‘Bunon(부농)’을 운영하던 셰프 시게루 나카미나토와는 7년 전 처음 알게 되었다. 삼각지의 한 식당에서 시게루가 요리를 하는 이벤트를 열어 찾아갔는데, 그가 내주는 요리마다 놀라워, 감탄이 자꾸 마음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벤트가 끝나고 탄복한 감정을 요리사에게 전달하며, 꼭 부농에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두 달 후 우연히 도쿄에 갈 일이 생겨 그날의 기억을 안고 부농을 찾았다. 그날 삼각지에서 내 리액션이 과했을까, 아니면 원래 섬세한 사람일까, 시게루는 내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 밀로시와 함께 갔는데, 오래된 가정집을 개조한 부농 특유의 소박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시게루의 진심을 담은 환대 덕분이었는지,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플러팅에서 벗어나, 우리 사이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가게 문을 열고 나서면서, 작은 인연도 소중히 대하는 시게루의 호의가 진심으로 고마워 말했다. “시게루상, 서울에 오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그 후 한 달도 안돼 시게루가 왔고, 코로나로 국경이 닫히기 전까지 한 달에 한두 번은 서울에서 만났다. 미식 여행을 즐기는 셰프답게 비행기에서 내리면 바로 나도 모르는 은평구의 동네 맛집에서 순댓국 한 그릇을 즐기고, 다음 일정으로 향하는 사람이었다. 코로나가 끝나고는, 이제까지 못 온 한을 풀 듯, 거의 매 주말마다 왔고, 이제는 나츠미와 함께 만나는 일도 잦았다. 나츠미는 케이팝 그룹 NCT의 열혈팬이라서 팬사인회, 팬미팅, 콘서트 등에 참석하러 한국에 거의 매달 왔는데, 본인 일정을 마치고 저녁 늦게 합류하곤 했다. 시게루가 딸 때문에 서울에 더 자주 오는구나 싶었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난임 시술을 받던 기간에, 한 번은 배아 이식을 하고 만난 적이 있다. 몸이 좋지 않아 와인은 사양하겠다고 했더니, 그러냐고 별생각 없이 듣는 것 같다가, 집에 먼저 가는 나를 배웅하면서 조심히 물었다. 혹시 임신했냐고. 놀라지 않은 척하며, 아니라고 말했지만, 실은 그때 임신 5주 차였다. 남편과 나만 알고 있었는데, 시게루 눈에는 보였나 보다. 비상한 눈치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 년 전 내가 출산 후 시게루에게 DM으로 아기 사진을 보내며 메시지를 적었다. “나도 이제 시게루처럼 딸이 생겼어.” 그 후로는 바쁜 나를 배려해 서울에 와도 내게는 전혀 연락하지 않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렸다. 번역앱의 도움을 받아야 대화가 가능한 일본인 친구였지만, 겉도는 대화를 한 기억이 없다. 작은 표정도 놓치지 않는 배려 깊은 관찰력과 친구를 향한 관심으로, 항상 내 마음 그대로를 보고 대화를 이어가던 사람이었다.


시게루 소식을 듣고 후회가 나를 괴롭게 했다. 지난 8월. 친구가 지금 시게루랑 나츠미랑 한강에 치맥 하러 가고 있다며, 혹시 나올 수 있냐고 물었다. 그때 내 앞에는 오른쪽 팔이 부러진 딸이 깁스를 하고, 왼손으로 짜증을 내며 점심을 먹고 있었다. 고민하다가 내가 나가면 울면서 매달릴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그때 잠깐이라도 갔어야 했는데. 시게루가 서울에 자주 오니까 다음에 오면 꼭 만나야지 했는데.


지난 일요일 저녁. 도쿄에서 시게루를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이 부농에 모인다고 했다. 일본에 갈까 고민하다가, 서울에서도 추도식을 한다는 친구네 가게가 있어 다녀왔다.


평소 시게루가 좋아하는 와인을 시게루 사진 앞에 여러 잔 바치고, 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친구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 이제까지 시게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넘겨 보았다. 평소 함께 오던 곳에서 사진 속 그를 보니, 그가 더 보고 싶었다. 내 옆에 앉아서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러다 흥이 나면 일어나 춤을 추고, 가끔 뼈 있는 말을 하던 내 친구. 사람들이 많이 오진 않았지만, 추모식에 들른 사람들 모두 시게루가 큰소리로 외치던 “깐빠아아이이”를 기억했고, 유쾌하지만 진지했던 그의 모습을 또렷하게 떠올렸다. 친구가 시게루에게 전수받은 레시피로 튀긴 가라아게를 내오면서, 나츠미가 홍콩에서 도쿄로 향하는 비행기를 막 탔다고 말했다. 시신은 홍콩에서 화장했다고 했다.


삼 년 만에 술병이 나게 과음했다. 누가 머리를 뒤에서 프라이팬으로 때린 것처럼 띵하고 아프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만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 왜 마음이 조금 나아졌을까? 시게루를 다시 볼 수 없는 현실이 여전히 슬프지만, 작별 인사를 한 것 같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 몸이 아픈 것도 애도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살뜰하게 운동하고, 책 읽고, 집에서 밥 해 먹고, 그렇게 아무 지장 없이 일상을 살아내는 내가 꼭 벌레 같았는데, 비록 술병이 나서 침대에 누워 구역감을 참고 있지만, 이게 더 사람같다. 애도는 몸으로도 하는 걸까? 과연 나는 누가 죽어야 일상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을까? 나는 얼마나 많은 친구의 죽음을 만나게 될까?


시게루는 내게 어떤 친구였을까? 인간적인 호감과 호기심으로 시작한 인연이었고, 공통의 친구가 없는 나의 외국인 남편과 함께 결혼할 시점부터 추억을 쌓은 친구였다. 나의 첫 번째 가족 친구! 흥겨움과 치열함, 유쾌함과 진지함이 한 사람에게 온전히 느껴질 수 있다는 매력을 알려준 친구. 죽기 전에 우리 딸을 못 보여줘서 한스러운 친구. 말이 다 통하지 않아도 서로를 향한 배려와 관심이 있으면 우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 친구.


아직은 뭘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어떤 방식의 애도를 해야 친구를 보내줄 수 있을까? 아직 혼란스럽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작별 인사를 해야한다. 나츠미에게 DM을 보내야겠다. 일본에 가겠다고. 시게루랑 나츠미를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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