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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Feb 27. 2023

2월의 밑줄(2/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2월 두 번째 주에 저를 도와준 문장들과 문장을 읽고 생각한 것에 대해 적어보았습니다.


02월 13일 월요일

인간들은 동물이나 식물, 사물보다는 자신이 훨씬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식물과 사물보다는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꿈꾼다. 그런데도 사물들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존속은 다른 무엇보다 더욱 강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
여느 사물들처럼 그라인더 또한 특별한 능력으로 이 모든 걸 흡수한다. 일시적인 것들,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을 자기 안에 붙잡아두는 것이다.

<태고의 시간> 올가 토카르추크 52p

이 문장을 읽고 우리 집에 있는 모든 것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사물을 생각해 봤다. 첫 번째, 거실에 있는 왕골 바구니. 막내 이모를 졸라 내가 빼앗다시피 가져온 것인데 외할아버지가 젊었던 1950년대에 만드신 것이다. 할아버지는 솜씨가 좋으셨다는데, 그 맵씨가 내 마음에도 쏙 들어 내가 거실에 두고 보고 있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이렇게 할아버지 손으로 만든 물건이 곁에 있으니 가깝게 느껴진다. 두 번째는 1972년에 시엄마가 결혼 기념으로 장만하신 도자기들. 받자마자 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거실 책장에 고이 모셔 두었다. 세 번째는 엄마가 쓰던 작은 육각형 나무 쟁반인데 내가 어릴 때 엄마가 귤 같은 것을 담아주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는 나보다 오래된 사물이 적어도 참 적다. 갑자기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곁이 허전해진 기분이다. 위 문장을 읽으면서 사물의 생명력에 대해 무척 공감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다 어디로 간 걸까? 어쩌면 덧없이 흘러가는 것들을 자기 안에 붙잡아 놓고 있는 귀한 사물들을 내가 매몰차게 없애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02월 14일 화요일

불안감을 일종의 자원으로 생각하고 “어느 정도의 불안감은 내가 더욱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에 임할 수 있게 해준다.“
 
<기대의 발견> 데이비드 롭슨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지만 항상 곁에 있는 존재도 있다. 그런 것들 중 가장 멀어지고 싶은 두 가지: 내 두꺼운 종아리와 불안감.


두꺼운 종아리와는 어느 정도 관계를 풀었다. 20대 나의 종아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최대한 그 존재를 숨겼고 집에 오면 드디어 세상으로 나온 내 종아리를 피도 눈물도 없이 구박했다. 주먹으로 치고, 병으로 문지르고, 랩으로 감고, 세븐 라이너에게 아웃소싱도 하며 다리를 고쳐 보겠다고 힘을 뺐다. 슬프게도 아무 효과도 없었다. 30대 초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야 내 종아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스쿼트, 점핑 스쿼트, 타이어 매고 전력 달리기 이런 운동을 했는데(크로스핏 같은 운동), 다른 여성 회원들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결과를 보고 내 종아리와 30년 묵은 증오의 관계를 풀 수 있었다. 이제는 가끔 고맙다는 생각도 한다. 내 다리로는 80대 할머니가 되더라도 산에 올라갈 수 있을 거야 같은 야심 찬 꿈도 꾸게 해주는 다리니까.


반면, 내 영혼에 찐득하게 붙은 불안감은 어쩌지 못하고 두고만 보고 있다. 그래도 20, 30대에는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는 기분이었는데, 40대가 되니 옆에서 채근하는 느낌으로 변했다. 오늘 아침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일어나서 책상에 앉았다. 읽던 책을 마저 읽자 하고 <기대의 발견>을 폈다. 불안/스트레스가 찾아왔을 때, 저런 또 불안한데 어쩌지 망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룹과 불안이 찾아오면 그래 이것도 에너지고,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그룹의 비교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작가는 실험결과 불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재해석한 그룹은 스트레스에 대한 피해가 적은 방면, 불안/스트레스가 해롭다는 믿음을 가진 그룹은 생리적 영향(뇌로 전달되는 피와 산소의 양 감소 등)까지 상당히 받았다고 했다. 불안의 재해석이라...... 배운 것은 써먹어야 진짜 배운 것이 된다고 했다. 오늘 불안한 순간이 오면 메모한 문장을 꺼내서 읽어 보려고 가방에 챙겼다. 퇴근 전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메모는 꺼내보지 않았는데 하루종일 그 문장이 머릿속에 있어서 인지 오늘도 분명 불안감을 느꼈을 텐데 정서적으로 고갈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불안감은 내가 더욱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에 임할 수 있게 해 준다. “ 고 하루종일 생각해서 그럴까?


02월 15일 수요일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에 망가지지 않고, 그 시간을 이겨내는 이들이 결국에는 삶을 제대로, 잘 살 줄 아는 이들일 것이다. (...) 아무런 의욕이 없을 때, 무너지지 않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 그런 건 대개 마음의 힘 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일상을 이끄는 의식이나 자기만의 습관화된, 믿을 수 있는 행위 같은 게 있어야 한다.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정지우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에 나는 무엇을 하나?


책으로 들어간다. 분명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거나 상황을 재평가해보고 싶어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사냥하러 떠난다. 정보를 모으면 길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다 백이면 백 딴 길로 새고 거기서 또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해서 동전을 발견한 까마귀처럼 신나서 원래 가지고 있던 고민을 잠시 잊는다. 이런 산만한 방식으로 몇 번은 나를 구했다.


가장 자주 의지하는 방법은 자는 것. 잠이 편애하는 축복을 받아 스트레스가 온몸을 휘감는 상황에도 잘 수 있다. 인생에 몇 번 잘 수 없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때도 반신욕 30분만 하면 곯아떨어질 수 있었다. 역시 불안과 스트레스는 수용성인가? 문제는 가끔 인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자는 것이다. 20시간이 넘게 자고 일어나서 잠깐 현실로 돌아왔다가 다시 현실을 잊고 싶어서 다시 잔다.


작가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글쓰기라고 했다. 작가의 글쓰기 안에는 누군가와 연결되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사람이 사람을 살린다고. 그러고 보니 나는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언제나 혼자였다. 내 밖으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고 뒷걸음만 쳤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힘든 것은 내색도 못했다. 속이 문드러질망정 대체로 웃으려고 했다.


엊그제 난임 오픈채팅방에서 만난 친구와 서울식물원에 가서 5시간 넘게 수다를 떨었다. 난임생활 초반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의 의기소침해진 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왜 그렇게 주변에 오픈해서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왜 난임동지를 만날 생각도 못했을까? 왜 혼자 고민만 했을까? 이제와 돌아보니 참 외롭고 불쌍한 시간을 보냈구나 싶었다. 그녀와 나는 헤어질 시간이 되니 훨씬 명랑한 사람들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서 힘든 것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 힘이 세지는 기분이 든다고 말하며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사람이 사람을 살린다고.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 겪을수록 이 말을 더 믿게 된다. 그러니 용기를 내서 주변에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라고, 더 자신 밖으로 나오라고 스스로에게 자주 말해야겠다. 자신은 없지만 오랫동안 연습하면 할 수 있겠지.


02월 16일 목요일  

상상이란 따지고 보면 창작의 일부이며, 물질과 영혼을 연결하는 일종의 다리와 같다. 특히 빈번하게, 집중적으로 할수록 더욱 그렇다. 이런 경우, 상상은 물질의 파편으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삶의 기류에 융합되기도 한다.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일이나 의무가 없던 시절(그러니까 미취학 아동 시절)에는 종일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꾸며대며 놀았다. 대계 이야기는 허무맹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는데 사실 나는 공주였다 거나, 초능력이 있는데 숨기고 살고 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엄마가 미용실에서 손님 머리를 해주는 동안 뒷방 책상 아래에 누워서 종일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누가 보여달라고 하면 부끄러워져서 딴청을 피웠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니 내가 만드는 이야기는 전부 시시해졌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글자 그대로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세상은 생각도 못했던 매혹적인 이야기들이 넘치는 곳이었다. 가끔은 미용실에 앉아 숙제하는 척하면서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 밖의 이야기들은 전부 대단하게 느껴져서, 이해는 못해도 오랫동안 듣고 있었다. 그렇게 내 밖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에 집중하며 살았다.


40대가 되어 퇴사를 하니 미취학 아동일 때만큼이나 시간이 생겼다. 시간이 생기니 상상하는 시간도 생겼다. 8살 때부터 내 밖에 있는 세상의 이야기만 귀 기울이고 살았는데, 이제는 그 이야기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내 안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올해는 무슨 색으로 칠하고 싶은지, 나는 어떤 이야기가 되고 싶은지, 나라는 사람을 소설의 인물처럼 놓고 다양한 인생을 그려보게 된다. 오늘 내가 꼽은 문장처럼 정말 집중적으로 상상을 하면 상상한 장면이 내 삶의 기류에 융합되는 걸까? 내 영혼과 현실의 물질이 연결되는 걸까?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르니 일단 한번 해봐야겠다. 즐거운 상상.


02월 17일 금요일

‘어떤 일의 결론을 즉각 내리지 않도록 하자’ ’가능한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라는 습관이 서서히 내 안에 형성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건 타고난 성향이라기보다 오히려 후천적 경험으로 따끔한 일을 겪어가며 몸에 밴 습관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가장 가지고 싶은 습관을 하루키 씨 책에서 찾았다. 마음속에 언어화하지 못한 생각이 있는데, 책을 읽다가 그 생각을 만나는 순간! 이것이 내 읽는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무척 반갑고 작가와도 깊은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나도 그처럼 결론을 즉시 내리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싶다. 지금 당장 판단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유혹에 매번 진다. 투두리스트가 하나씩 줄어들 때의 그 쾌감이 뭔지 정작 느리게 생각해야 할 일도 빠르게 쳐버리게 만든다. 이렇게 빨리 판단한 일의 결과로 어른이 된 이후 내내 수습하며 사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판단을 잠시 유보하고 애매하게 방치된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조급해진다. 해야 할 일이 머리 위에 앉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할 일이 생기면 미루지 못하고 즉시 해버려야 안심이 된다. (너무 오랫동안 지시를 받고 살아와서 그럴까요?) 사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해결되는 일도 부지기수이고, 어떤 일은 물리적으로 시간이 걸리는데도 내 마음은 모든 것을 즉시 해결하려고 한다.


이런 고민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본인이 들었던 조언을 나눠주었다. 중요한 결정이라면,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에 결정하라고. 첫 번째 직장이었던 군대에서 상사가 해준 말인데 자신에게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독일 군대서는 조직 내 보편적인 조언으로 아마 전쟁을 하며 수시로 변하는 상황을 생각하라는 뜻이었을 것 같아요.) 나보다 성격이 더 급한 사람이라 나도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조언을 받은 이후에 몇 번 시도했는데 아직도 이 애매함을 견디기가 어렵다. 결정해야 잘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즉시 결정하고 수습하는 삶은 너무 따끔하니까 더 노력해 봐야겠다. 언젠가 몸에 배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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