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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Feb 27. 2023

2월의 밑줄(3/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2월 세 번째 주에 저를 살려준 문장과 문장에 반사된 짧은 생각입니다.


02월 20일 월요일

인간은 몸이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과 끝은 몸 안에 있다.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요즘은 몸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컨디션이 매일 좋았던 30대까지는 별로 생각하지 못했다. 내 몸은 항상 불평 없이 관대했기 때문에 관심받지 못했다. 또, 그때까지는 내가 이룬 것, 내가 욕망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의했기 때문에 몸은 나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소외되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몸으로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문장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과 끝은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나서인 것 같다.


처음 그리스에 갔던 여름에 발랐던 선크림 냄새, 새 봄마다 환장하는 여린 파나물 맛, 야근하면서 집중이 떨어지면 (집에 가고 싶으면) 들었던 베토벤, 내 첫 기억인 엄마가 막 태어난 동생을 집에 안고 오던 장면, 남편과 첫 키스했던 촉감. 내 모든 기억이 몸으로 시작해 몸 안에 남아있다.


02월 21일 화요일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 단편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루하실 수도 있지만, 오늘 저의 행동들을 적어보겠습니다. (경고: 진심으로 지루할 수 있음)


7시에 일어나서 유산균과 영양제를 먹었습니다.

춥다고 뭉그적거리다, 몸무게를 재고 화들짝 놀라서 수영장으로 향했습니다. 요즘 제가 집중하고 있는 분야는 팔꿈치 빨리 꺾어 물 많이 잡기. 특급드릴을 했더니 어깨가 두 배쯤 넓어진 것 같습니다.

집에 와서 목마른 식물들에게 오늘의 광합성을 응원하며 H2O를 공급하고,

왜 은행은 돈 냄새가 안 날까를 궁금해하며 외국인 남편은 혼자 할 수 없는 은행 업무 비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동네친구와 그녀의 개를 만나 해가 잘 드는 카페에 앉아 그녀의 겨울에 대해 이야기하고,

11시 비로소 회사에 와서 거북목 자세로 고뇌에 찬 모습을 보이다가, 준비하는 웹서비스를 개발할 회사의 잘생긴 대표님과 앞으로 6개월 동안의 업무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증글을 쓰고 있어요. 이후의 일정은 저도 모릅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르는 법이니 서프라이즈도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가서 책을 읽겠죠.)


이것이 제 현재입니다. 그리고 어제 적은 문장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김연수 작가님 말이 맞아요. 내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가 아닙니다. 내가 살고 싶은 미래가 나를 움직이게 하고 있어요.


내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내일의 장건강이며

두 배 커진 광배근으로 물을 잘 잡아서 머지않은 미래에 수영반에서 경쟁하고 있는 아저씨를 이기는 제 모습입니다. (두고 봐라)

올여름 더 반짝거릴 식물들의 이파리이고

완벽하진 않지만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오늘을 마무리할 남편의 웃는 얼굴이며

친구도 친구의 개도 나를 만나고는 조금이라도 오늘을 즐겁게 보내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준비하는 서비스를 마침내 론칭했을 때 이용하시는 분들이 편리하게 활용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시면 좋겠다는 바람이고,

인증글을 쓰며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쓰는 생활을 즐기며 계속했으면 하는 미래의 제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02월 22일 수요일

계속하는 것, 그게 노력이고 재능이다.

<쓰는 기분> 박연준

계속하시는 것이 있으세요?


이것을 못하는 것이 제 단점입니다. 중독된 것처럼 깊이 빠졌다가 뒤도 안 보고 나와버리는 성향이랄까요? 지나간 남자친구들에게도 모두 미안합니다. 회사도 자주 바꾸었고, 자주 보는 친구도 바뀝니다. 어릴 때는 짝꿍이 바뀔 때마다 글씨체도 달라졌습니다. 심지어 몇 년 주기로 저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루해집니다. 이 시기가 되면 슬슬 자동으로 욕구와 희망이 변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이지만 다른 영혼이 제 정중앙에 앉아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일기의 내용도 변하고 자주 가는 곳들도 변합니다. 


이제는 좀 정착하고 싶습니다. 그만 기웃거리고 제 정중앙의 자리를 여러 명에게 내주는 것도 더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아의 연속성에 대한 자신이 없으니 길게 무엇을 계획하는 것도 무척 어렵습니다. 5년 후, 10년 후의 계획을 세우라는 말은 그야말로 불가능하고 다만 1년 후의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일지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변덕스러운 자아를 믿어줄 수가 없어서 현재 준비 중인 창업아이템도 아주 소분해서 투자하고 있습니다. 분명 큰 개발비를 쓰고 나서 내가 또 돌변할지도 모르거든요. 


저도 계속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저이고 싶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새 친구가 생겼다고 글씨체가 바뀌지는 않고, 내가 지루해지는 감각도 좀 더디게 찾아옵니다. 나이가 들어 그만큼 생활에 변화가 적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 참에 더 박차를 가하려고 합니다. 지루한 것도 견디기, 무엇이 되었든 계속하기, 인내의 근력을 키우기, 너무 감정적으로 결정하지 않기를 도전 중입니다. 어쩌면 제 인생은 계속하는 것을 도전하는 도전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월 23일 목요일

이 산책이 하루의 나를 만든다. 하루 종일 이 일 저 일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고 타인이 나, 또는 내가 만들어내는 상품을 선택해주지 않는다면 먹고살 수 없는 이 현실 속에서, 나는 내 자발적인 의지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이 30분의 산책으로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에 조금, 아주 조금 가까워진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한수희

000이 하루의 나를 만든다. 나에게 000은 뭘까?


갓수희 작가님처럼 이렇게 '산책‘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슨 질문이든 한 단어로 산뜻하게 답해내는 쏘쿨한 내가 되고 싶지만, 실상은 한참을 생각해도 답을 내지 못할 때가 많다.


누군가, 예를 들면 심리상담 선생님이 물어본다고 생각해 봤다. “일상 속에서: 은님이 바라는 모습에 조금 가깝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라고 물어보신다고. 그러면, '뭐 딱히 잘 모르겠지만, 몇 가지가 떠오르기는 해요' 라고 자신 없이 이야기할 것 같다.

>

일기를 써요. 분명히 제가 쓰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 같아요. 손이 쓰고 제가 읽어요. 나 이런 마음으로 살고 있구나 하고 알게 돼요. 신기해요. 36살 전에는 일기는 쓸 생각도 못했어요. 어릴적 그림일기 써본 게 다이니까요. 그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일이 많았는데 누구에게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별수가 없어서 공책에라도 말하자 하고 시작했어요. 창구가 필요했나 봐요. 매일 쓰는 것보다는 일주일을 몰아서 쓰는 것을 좋아해요. 그럼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아주 조금은 나에게 왔던 날들을 예쁘게 볼 수 있고, 바로 보이지 않았던 내 표정 말고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보이거든요.


수영도 해요. 선생님, 제가 제일 못하는 게 스스로 칭찬하기잖아요? 유일하게 수영장에서 나올 때는 수영장 와서 나 진짜 잘했다 너무 잘했다 호들갑을 떨며 스스로 칭찬해 줘요. 수영도 일기랑 비슷한 점이 있어요. 몸 상태가 어떤지 전혀 모르고 수영하기 시작해요. 그럼 아 내가 허리가 아팠구나, 체력이 떨어졌구나, 오른쪽 어깨가 아프네. 이렇게 내 몸을 모르고 있다가 비로소 알게 돼요. 분명히 내 몸인데 말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물이 제 몸을 타고 넘어가는 그 촉감이 너무 황홀해요. 여름밤에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팔을 스치는 그 감각 혹시 아세요? 그 기분을 수영하는 내내 느낄 수 있어요. 물이 저를 안아줘요.


선생님, 결국 두 가지인가 봐요. 일기와 수영이 하루의 저를 만드네요. 복잡하지 않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02월 24일 금요일

떳떳하기 위해서는 많은 획이 필요하구나 생각했습니다.

: 리추얼 메이트 마틸님의 23-02-23 문장 일기 중에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입니다. 대머리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아무런 설명은 없이 ‘모두 일어나’ 하셨어요. (생각해 보니 그 시절 선생님들은 뭘 설명해 주는 일이 없었네요.) ‘여기서 집이 전세나 월세가 아니면 앉아.’ 이어서 ‘집에 차가 있는 사람은 앉아.’라고 하셨죠. 거의 다 앉고 서 있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서 5명 정도였어요. 친구들이 서있는 나를 보고 너도 그냥 앉아라고 했지만, 엄마가 항상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으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어요. 선생님은 이어서 ’ 이렇게 5명이 1학기 우유를 공짜로 먹는 거다 ‘라고 했어요. 처음으로 수치심 같은 것을 느꼈어요.


어릴 때는 떳떳한 것이 무척 중요했어요. 엄마가 아침마다 말해주셨거든요. ’ 학교 잘 다녀와. 항상 떳떳하게 행동하고.‘라고요. 지금 생각하니 그때 엄마에게 필요한 것이 떳떳함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시절 사업하는 집이 대개 그렇듯 그때는 가족이 모두 떨어져 살았고, 엄마는 내가 등교하기 전에 출근하시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게 어떤 종류의 떳떳함이든 엄마는 그때 그 감정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반장이 되면 그렇게 좋아하셨나 봐요.


이제는 예전만큼 떳떳함에 대해 자주 떠올리지 않아요. 그런데 마틸님의 문장 일기를 보고 떳떳함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 보다가, 젊은 엄마의 서러움 같은 것을 알아채게 되네요. 그때 엄마는 38살이었는데,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몸도 마음도 참 힘들었겠어요. 요새 자주 뵙지 못했는데, 함께 나누는 시간을 더 가져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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