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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Mar 27. 2023

3월의 밑줄(3/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03월 24일 금요일  


✍️과거는 더 먼 과거로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지금 이곳으로 거슬러 올라온다는 것이 그의 시간관이다.

신형철, <인생의 역사>, 311p


우정님의 ’ 조심‘의 문장을 읽고 비로소 읽게 된 책이었어요. 어제 오후에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을 느리게 읽으며 헤어지기 싫어서 전 페이지로 돌아가서 다시 읽기를 하고야 겨우 책을 덮을 수 있었네요.

에필로그에 나온 박준 시인의 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인은 과거는 그렇게 멀리 흘러가는 게 아니라 현재로 거슬러 올라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요. ‘그러니까 현재 내 삶의 어떤 순간순간이 미래의 시가 된다는 마음.’(313p)이라고요.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올 3월이 어떻게 거슬러 올지 참 궁금하네요. 일단 <글쓰기의 최전선>과 <인생의 역사>라는 아름다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행운과 그 감응을 메이트 님들과 나누었던 시간은 확실히 찾아올 것 같습니다.


03월 23일 목요일  


✍️그는 보들레르의 시나 모리 오가이의 소설을 읽을 때의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었고, 그것이 자기라는 존재를 긍정하는 입구였다고 고백한다.

신형철, <인생의 역사>, 254p


어느 아침은 다른 아침과 다르다. 어제가 그랬다. 스타벅스에 항상 나오는 재즈 음악 같은 사소한 것에도 고마운 마음이 들고 손에 잡고 있는 책의 문장도 눈에 들어오자마자 온몸으로 감응이 퍼진다. 읽은 문장마다 생각나는 것들이 가지를 뻗어 울창한 숲을 이루고, 그때마다 그 생각으로 글 한편씩 짓고 싶었다.

이런 아침은 어떻게 오는 걸까? 내가 만든 건가? 선물 받은 건가? 얼마나 자주 오는 걸까? 봄에 더 자주 오는 걸까? 궁금하다.

이런 아침에는 감동받을 준비가 완벽히 된 것처럼 마음이 활짝 열리고 구석구석 뇌세포가 함께 합창해서 머리가 두 배쯤 좋아지는 기분도 든다. 감성과 이성의 문이 함께 열려 들어오고 또 나가는 것이 자유롭다. 많은 것을 느끼니 많은 것을 말하고 싶어 진다. 근사한 기분이다. 방금 읽은 문장처럼 이런 아침은 나라는 존재를 긍정하게 되는 입구와 같다.


03월 22일 수요일


✍️올 겨울도 많이 추웠지만 가끔 따스했고, 자주 우울했지만 어쩌다 행복하기도 했다. 올 겨울의 희망도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봄이고,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봄에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꽁꽁 얼었던 겨울이 가고 싱싱한 봄이 오는 것이 아직도 신기하다. 40번을 넘게 보았는데도 그렇다. 앙상한 나무에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알알이 눈이 올라오더니 불이 켜지듯 초록색 싹이 나는 것이 어떤 마법보다 놀랍다. 봄마다 기적을 경험하는 것 같다.

다른 계절의 변화는 자연스러운데 겨울에서 봄이 되는 것은 어떤 경계를 벗어나는 기분이다. 3월부터 학기가 시작되는 것 때문일까, 회색이던 풍경이 초록색으로 변해서일까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아는 건 춘분 즈음이 되어 새해의 숫자에도 익숙해지고 길가의 개나리도 구경을 해야 비로소 새해가 시작했다는 것을 실감한다는 것이다. 이제야 2022년이 아니라 2023년이 된 것 같다. (저만 이렇게 느린가요?)

내 마음이 겨울일 때는 내 일상에는 절대 봄이 도착하지 않을 것 같다. 이 냉동고에서 얼어 죽을 것 같다. 그러다 이렇게 실제로 눈앞에 매화가 꽃잎을 펴고, 새들이 분주해지는 봄이 만져지니 하늘이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쫌 믿으라고! 하늘의 섭리!


03월 21일 화요일  


✍️서둘지 말고, 바라지 말고, 당황하지 말라. 이 셋은 자주 엉킨다. 바라는 것이 너무 많은데, 이룬 것이 너무 없어 당황스러울 때, 그때 서두르게 되는 것이다.

신형철, <인생의 역사>, 228p


서둘고, 바라고, 당황하는 이 세 마음을 믹서에 갈면 딱 10년 전 제 마음이네요. 그때는 정확히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고 서둘렀고 당황했어요. 돌아보니 나를 노예처럼 대우했더군요.

지금은 아주 조금 덜 서두르게 되는데 왜 그럴까 나이 먹어서 그런가. 나이 먹는 게 이런 거라면 참 좋다 싶어요. 그러다 오늘 이 문장을 읽고 바라는 마음이 그때와 비교하니 무척 적어졌다는 것도 알게 되네요. 나는 이제 나의 한계를 어설프게나마 알죠. 은유 작가님 말대로 삶은 종종 자연재해와 같기도 하니 지금 여기에 충분히 감사하자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사니 바라는 것도 억제하고 사는 것 같아요. 서두르지 않아서 좋지만 꿈꾸는 능력까지 박연준 시인의 말처럼 절제하다 사라져 버린 능력이 될까 봐 무섭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갑자기 어지러워요.

PS: <인생의 역사>는 위험한 책이었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숙제를 계속 던져 주셔서 제 마음은 너울을 만난 배처럼 울렁거립니다.


03월 20일 월요일


✍️과수원에는 해마다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두 개의 시간이 있다. 하나는 사과나무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배나무의 시간이다. (..) 배나무의 해에는 새로운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시작되었던 것들은 그 상태로 지속을 도모하고, 여태껏 생겨나지 못한 것들은 부재 속에서 힘을 축적한다. 식물들은 뿌리와 줄기가 더욱 강인해지지만, 키가 자라진 못한다 꽃들은 서서히 한가롭게 피어나는 대신, 거대한 꽃송이를 만들어낸다. 장미 넝쿨에서는 그리 많은 꽃은 피지 않지만, 대신 장미 송이 하나하나의 크기가 사람 주먹만큼이나 크고 탐스럽다.

올가 토카르추크, <태고의 시간들>


책은 끝났는데 생각은 시작되는 문장이 있다. 사과나무의 시간과 배나무의 시간이 그랬다. 지난달에 읽은 이 책. 울림이 깊은 다른 문장도 많았는데 이 ‘시간들’이 나를 계속 따라다니는 이유는 뭘까.

이 부분을 읽고는 내 삶의 사과나무 같던 시간과 배나무 같던 시간이 생각났다. 그리고 지금은 배나무의 시간이구나라고 깨달았다. 나는 늘 배나무의 시절에는 잘 지내지 못했다. 좀 더 잘할 수 없어라고 다그쳤다. 일기 쓰는 시간은 스스로 손바닥을 때리는 시간이었다. 유난히 스스로에게 혹독했던 배나무 시간인 2020년 겨울로 돌아가서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단호하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너의 키가 자라고 있지는 않지만 뿌리가 단단해지고 있어. 꽃도 몇 송이 피지 않을 테지만 돌아보면 정말 크고 아름다울 거야. 이 시간은 힘을 축적하는 시간이야. 믿어도 돼. 그리고 머지않아 사과나무의 시간이 올 거야.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읽은 문장이다. ‘모든 글(책)의 최종 목적은 ‘감동’이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은 신체가 바뀌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다.’ 나는 이제 사과나무의 시간과 배나무의 시간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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