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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Jun 09. 2023

6월의 밑줄(1/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06월 05일 월요일  


페이지가 줄어드는 걸 아까워하며 넘기는 새책의 낱장처럼, 날마다 달라지는 창밖의 풍경을 아껴 읽는다. 해의 각도와 그림자의 색깔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숲의 초록빛이 조금씩 번져나가는 걸 호사스럽게 누리는 날들.

_ 백수린,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78면


<6월 예찬>

싱싱하게 자라는 여름을 이토록 마음을 다해 받아낸 시절이 있었던가? 3, 4월에 손톱만큼 작고 여리던 이파리들도 6월의 강렬한 햇빛을 받아낼 힘을 단련해 낸 것이 기특하고, 좀 덥다 싶으면 어디선가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6월을 아껴 읽는다. 6월에는 여름은 있는데 습도와 장마는 없다. 역시 무구한 존재들은 좋은 것을 더 섬세하게 알아채는 것인지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더 힘찬 것 같고, 산책하는 강아지들의 꼬리도 더 살랑살랑 경쾌한 리듬을 타는 것 같다.

이렇게 한 장씩 지나가는 6월이 아쉽다. 시작하면 끝을 생각하는 이런 나쁜 습관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오늘이 5일이니 6월이 한참 남았는데도 내일이라도 당장 6월 30일이 될까 봐 애가 닳는다. 이런 마음을 곧 있으면 먹을 수 있는 노지 재배한 자두며 살구 생각으로 달래고, 더 붐비기 전에 을밀대에 가서 평양냉면도 한 그릇 해야지 다짐도 해본다.

봄에서 여름으로 지나가는 달이라고 생각했던 6월. 방학이 시작하기 전 봄과 여름사이 끼어있는 달이라고 생각했던 6월. 6월을 40년 이상 겪어보고야 6월이 좋다고 이야기하고 있자니 헛살았나 싶기도 하다. 이제까지 몰라봤던 6월이 오늘도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호사스럽게 6월을 누려야지.


06월 06일 화요일


완벽이라는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게으름의 면죄부가 되어선 안 되겠지만 완벽한 것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결국 그 누구도 행동할 수 없게 만드는 나쁜 속삭임이다.

_ 백수린,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71면


<2023년 망종에는>

오늘은 망종(芒種)이다. 이십사절기 중 하나로 일 년 중 논보리나 벼 등의 곡식의 씨를 뿌리기에 가장 알맞다는 날이다. 계획을 세웠다. 앞으로 망종마다 내 마음에 뿌리고 싶은 문장을 골라보는 것이다. 2023년 내 마음의 밭에 뿌리고 싶은 문장은 바로 이 백수린 작가의 말이다. 완벽한 것만 의미가 있다는 나쁜 속삭임을 얼마나 자주 했던가. 마음속에 100점을 맞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어린애가 살고 있는데, 70점도, 80점도 괜찮다고 달래 봐야겠다. 그러면 인생에 좀 더 많은 행동들이 자랄 수 있겠지.


06월 07일 수요일


사람이 밉고 싫어서 마음이 지옥 같을 때 시가 준 깊은 평화는 잊을 수가 없다. 시를 읽으면 파도치던 마음이 잔잔해진다. 정현종이 쓴 <섬>이라는 유명한 시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_김이경, <시의 문장들>, 18면


섬1:

스몰토크 좋아하시나요? 제가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스몰토크입니다. 진지하지 않게 하려고 하니 알맹이가 빠져 대화가 흐물거리고, 알맹이를 채우면 너무 무거워져 상대를 어색하게 합니다. 그래도 내제한 사회성을 발바닥부터 끌어다 쓰면 한 시간 정도는 버티는데, 그것도 힘들어지면 화장실에 들어가서 변기 뚜껑을 닫고 잠시 앉아있습니다. 그때 전 사람들 사이의 섬에 다녀온 것이었군요.


섬2:

예전 직장에 낮은 파티션 하나를 두고 나란히 앉아 근무하던 부장님이 있었어요. 부장님도 저를, 저도 부장님을 힘들어했습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숨소리까지 들리는 거리에 앉아서 지낸 시간에 이 시를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마음속으로라도 사이에 섬이 있다고 떠올릴 수 있었다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요.


06월 08일 목요일  


내가 그러했듯이 할머니 역시 할머니의 한계 안에서 나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_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 26면


<내 한계 안에서>

출산이 80일 남았다. 개인적이고 희생이라는 것은 모르는 내가 누군가를 책임지는 엄마가 된다는 것이 전혀 믿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친구 H가 울면서 말하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녀는 빵을 먹다가 내려놓고 눈이 빨개지더니 "나는 좋은 엄마는 아닌 것 같다."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느끼는 실패감이 전달되어 나도 같이 울었다. 그리고, 나도 그 실패감을 느끼게 될 것 같아서 두렵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화자인 나(딸)에 대한 소설인지 전혀 모르고 <친애하고, 친애하는>을 읽었다. 딸을 임신한 내가 이 시기에 이 책을 읽은 것은 신기한 타이밍이었다. 길지 않은 소설을 읽으며 복잡한 마음이 되었다.

- 내가 엄마에게 느끼는 미움과 원망을 내 딸도 나에게 가지게 되겠구나.

- 엄마도 모르게 나에게 주었던 상처를 나도 내 딸에게 주겠구나.

- 그녀는 나에게 냉정할 테고 아빠에게는 관대할 것이다.

- 실패할 것이 뻔한 사랑이구나. 사랑의 성공이 아닌 실패를 향한 실천의 인생이 시작되는구나.


얼마 전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너무 많이 울어서 왜 그랬지 잘 몰랐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 신부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과묵한 아버지가 아니었는데 - 내가 우리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우리 딸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를 모두 표현해야 하는 분이었다.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이 전해졌다. 내 안에 자라고 있는 엄마로서의 시선을 건드려 그렇게 울었던 것이다.


이 문장이 참 고맙다. 내 두려움과 불안에 어느 정도는 안심을 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한계 안에서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나도 내 한계 안에서 사랑을 실천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06월 09일 금요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_ 진은영, <물속에서> 부분, <우리는 매일매일> 중


책 <시의 문장들>의 김이경 작가님은 이것이 삶을 설명해 주는 문장이라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 제 인생도 다르지 않네요.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와서 아는 사람들이 되고,

모르는 동네가 내게 와서 아는 동네가 되고,

모르는 작가의 책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작가가 되고,

모르는 일을 만나 아는 일이 되고요.

이렇게 생각하니 인생이 정말 간단하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요.

오늘은 시를 읽다가 용기를 얻습니다. 올봄과 여름에 제가 크게

실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시가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내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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