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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Jul 22. 2023

7월의 밑줄(3/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07월 17일 월요일


도망의 좋은 점은 비장하지 않다는 거예요.

(<DP>, 김보통 작가의 인터뷰 중)

_ 장수연,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 221면


나영석 PD의 유튜브 라방을 보다가 그가 지나가는 말로 이랬다. 어떤 사람들은 주변부에서 핵심으로 접근하고, 어떤 사람들은(본인은) 핵심으로 바로 들어간다고. 예를 들면 업무를 시작하려면 책상정리도 하고, 이것저것 정리를 하면서 본 업무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이게 접니다), 본인은 꼭 해야 하는 것으로 바로 들어가서 그것만 딱 하고 나온다고. 그래서 본인은 정리가 항상 부족하다고.


이 말을 들으면서 헉, 찔렸다. 그날 오전에도 사무실에 도착해서 할 일을 쭉 적었다. (곧바로 비장해졌다. 오늘도 제대로 해보자!!!) 그리고 약 3시간 동안 주변부의 시급하지 않은 일을 처리했다. (폴더정리, 일정정리, 오곰장 문장 정리 등) 그렇게 더 이상 주변부 일이 남지 않았을 때 비로소 내가 원래 해야 할 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비장하지 않은 일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힘 빼고 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잘하고 싶은 일들은 힘이 빡! 들어가는가? 왜 이렇게 매번 비장해지는가? 나에게서 비장함을 빼고싶다.


07월 18일 화요일  


기분이 좋은 일, 네가 행복해지는 일을 더 많이 찾아서 하렴. 어른들이 쓸데없다고 나무라는 일,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아도 재밌다고 생각하는 일을 많이 해보렴. 책상을 벗어나 걸어 다니렴. 어른들이 오랫동안 수갑처럼 채워놓은 죄의식을 풀어버리렴. ‘마땅히’라는 말을 바다에 던져버리렴. 걱정과 불안 때문에 현재를 달달 볶는 일은 그만두렴. 나아갈 때는 전진만 있는 게 아니란다. 지그재그로 춤추듯 깡충거리며 나아가도 되고, 멀리 돌아가도 괜찮아. 시간은 얼마든지 많단다. 후진했다 다시 나아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부디 나처럼 걱정이 많은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_ 박연준, <고요한 포옹>, 106페이지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마음속 크게 자리 잡은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도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J언니와 언니의 딸 Y다. 장마가 잠깐 쉬어 가는 무척 습한 날 예술의 전당에서 둘을 만났다. 네덜란드에 사는 언니와 2년 만에 만났는데, 일주일 만에 만난 것처럼 부재의 시간이 느껴지지 않았다. (20살에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러네. 신기해라!) Y는 백희나 작가님 팬인데, 한국에 있는 동안 우연히 <백희나 그림책전> 전시를 해서 같이 보러 갔다. 2년 전 한국말이 많이 서툴렀던 Y는, 9살이 되어서는 말을 정말 잘하고 많이 해서 놀랐다. (아이들에게 2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크구나!) <구름빵>, <알사탕>, <장수탕 선녀님>을 특히 좋아해서 그 책에 나오는 장면을 실제로 세트처럼 만들어 놓은 작품을 볼 때는 눈이 알사탕처럼 커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그 애를 귀애하는 마음도 구름빵처럼 커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박연준 작가님의 <고용한 포옹>에 이 부분이 떠올랐다. Y에게 이 문장을 읽어주고 싶었다. 한 글자씩 따라 적으며 마음으로 Y에게 편지를 보냈다. 행복해지는 일을 더 많이 찾아서 하렴, 지그재그로 춤추듯 깡충거려도 좋아, 부디 나처럼 걱정이 많은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곧 또 보자.


07월 19일 수요일


- 너를 귀하게 대할 사람이 아니다.

- 기걸 어마이가 어떻게 알아.

- 같이 밥 먹을 때 보라. 생선이든 고기든 가장 큰 살코기를 집어가는 기를. 영옥이 너가 귀하면 기렇게 하갔어? 말은 재미나게 하디. 기건 나도 알갔어. 기런데 영옥이 네 말 들어주는 모습을 내레 본 적이 없다.

_ 최은영, <밝은 밤>, 216-217면


돌아가신 큰아빠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아이들은 누가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지 귀신같이 안다고 했지. 난 기억도 나지 않지만 큰아빠가 날 귀하게 대해주셨다는 감각이 있다. 내가 어릴 적 큰아빠가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시면, 엄마는 큰아빠가 좋아하시는 조기를 구워드렸는데, 대여섯 살 먹은 내가 큰아빠 옆에 앉아 그 생선 한 마리를 제비 새끼처럼 전부 받아먹었다고 했다. 후식으로 드린 포도도, 내가 곁에 앉아 그렇게 한 송이를 다 먹었다고. 큰아빠가 김제 큰집에 가셔서 큰엄마에게 '은이네 엄마는 내가 다 먹은 줄 알 것이야.'라고 하셨다고 큰엄마가 요즘도 만나면 가끔 이야기해 주신다.


맛있는 것을 먼저 주고 싶고,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은 상대를 귀하게 여기를 마음에서 나온 다는 것. 그 기본적인 인식을 아주 오랜만에 이 소설을 읽다가 떠올렸다. 나는 누구를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누가 나를 귀하여 대해주는지 책을 덮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07월 20일 목요일


개와 사람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듯이 삼십 대인 나의 시간과 칠십 대인 할머니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_ 최은영, <밝은 밤>, 244면


1. 이 소설을 읽다가 소원이 생겼다. 내 할머니, 엄마, 나, 곧 태어날 내 딸과 4대가 함께 사진을 찍는 것. 그럼 4명의 딸, 3명의 엄마, 그리고 2명의 할머니가 찍는 사진이 되겠네.


2. 90세가 넘은 내 고운 할머니의 시간은 사십 대인 나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러고 보니 10대의 내 시간과 40대의 내 시간도 다르게 흐르는구나.


3. 보통 소설은 깨끗하게 읽고 중고 서적으로 파는데(읽은 소설을 다시 읽은 적이 없고 책은 부동산을 차지하니까), 이 소설은 몇 년 후에 다시 읽고 싶어서 다시 책꽂이로 돌아갔다. 다음에 읽을 때는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읽게 될까?


07월 21일 금요일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_ 최은영, <밝은 밤>, 156면


남편과 내가 가장 다른 점이 이것이다. 나는 내 존재를 심지어 나 스스로에게까지 증명하지 않고서는 사는 법을 모른다. 남편은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도저히 살 수 없는 삶을 내 눈앞에서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자주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대체로는 저 사람 왜 저러나 싶어서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춤을 추는 모습은 아무래도 적응이 어렵습니다. 저는 조르바와 결혼한 걸까요?) 태어나 처음으로 내 자녀의 아빠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유도 이것이 가장 컸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언제부터 만들어지는 걸까? 언제부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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