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후나 Jul 21. 2023

7월의 밑줄(2/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07월 10일 월요일


당신에게도 터닝 포인트가 있는가?

_ 장수연,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 257면


1. 남편에게 이 질문을 했더니, 10년 전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을 격은 때라고 했다. 그 이후로는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고 살지 않는다고. 시간이 아깝다고.


2. 지난달 고모가 돌아가셨다. 이제 아빠에게는 부모와 형제가 모두 세상에 없고 혼자 남았다. 아빠는 요즘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싶을까?


3. <뜨거운 싱어즈>의 신영광 PD의 터닝 포인트는 할머니의 임종과 본인의 암 수술이었고, 정서경 작가의 터닝 포인트는 엄마가 된 일이라고 했다. 장수연 작가님은 터닝 포인트가 있냐고 물었고, 같은 질문으로 죽음 가까이에서 삶의 소중함을 절감해 본 적이 있냐고 했다. 죽음 가까이에 있던 적도 있었고, 죽음 같은 절망 안에서 숨 쉰 적도 있지만, 아직 나에게 터닝 포인트는 없는 것 같다. 그 포인트가 내게 언제 올지 궁금하기도 하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07월 11일 화요일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_ 최은영, <밝은 밤>, 14면


정말 이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것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마음에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다.



07월 12일 수요일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_ 권여선, <아직 멀었다는 말>, 73면


어제 정기검진에 다녀왔다. 요새는 무사하다는 펀치를(태동을) 자주 받아서 (특히 오른쪽 옆구리로, 뜨헉!) 비교적 평화로운 마음으로 초음파실 대기실에 앉아 책을 읽었다. 내 차례가 되어 누워서 배를 내밀고 흑백의 화면으로 아기를 봤다. 이제는 제법 커서 화면에 머리도 다 잡히지 않았다. 내 뱃속이지만, 언제 봐도 믿을 수 없이 신기한 화면을 숨을 참고 봤다.


진료실로 가니 주치의 선생님이 아기가 작은 편이라고 했다. 원래 작은 아기일 수도 있지만, 엄마에게 산소와 영양분을 제대로 못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대체로 엄마의 나이 때문이라고 하니, 더 이상 질문할 수도 없이 입이 막혔다. 그 이후로 나는 소화기관의 가동률을 100% 이상으로 올리고 최선을 다해 먹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먹는다고 아기가 클까? 원래 생겨먹은 데서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걸까? 요즘도 자주 아기가 6일 된 세포인 시절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시험관 아기는 배아를 이식할 때 보여주시거든요.) 누워서 그 사진을 보면서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저 세포 안에 아기는 어떤 성격에,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종아리 모양을 하고, 어떤 운동에 소질이 있을지 등 모든 것이 들어있겠구나. 그리고 내가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겠구나. 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대로 펼쳐지도록 도와주는 일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겠구나.


그래도 혹시나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오늘 저녁도 열심히 먹어볼 생각이다. 수박을 많이 먹으면 잘 자란다고 했으니 집에 가면서 수박을 사야겠다. 읒차!



07월 13일 목요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그저 묵묵히 계속해나가는 것만이 이 막막함에 마침표를 찍어준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뾰족한 답이 없대도, 이제 와서 그만두면 뭐 할 것인가. 고민이 있다면 있는 대로 다음을 향해 묵묵히 가보는 거다.

(강인 PD의 에필로그 중)

_ 장수연,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 343p


이른 벚꽃이 피던 4월 2일에 개발사에 계약금을 송금했다. 3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프로젝트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60% 정도의 진척률) 마감보다 빨리 끝나는 프로젝트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손톱을 물어뜯게 된다. 어제 오후에는 답답한 마음을 백지에 털어놓았다. 오늘 다시 읽어보니 지금 개발이 끝났다고 해도 참 막막한 일이 아닌가! 서비스를 어떻게 알리고, 사용자를 무슨 수로 모을 것인가? 지금까지는 내 마음대로 만들었는데, 사용자들은 전혀 필요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장마의 한복판. 이태원 골목길에 빗물로 작은 개천이 생겼다. 판초를 꺼내 입고 발목까지 오는 물길을 거슬러 사무실로 출근했다. 개발사에서 보내온 검토 자료를 봐야 했다. 오늘도 오류는 개선이 되지 않았고, 요청사항에 대해서는 답변이 없다. 물론 지금까지 잘해주셨고, 빠르진 않아도 착실하게 진행하는 개발팀이라는 믿음은 있다. (초조해하지 말자.)


검토 피드백을 보내고 아껴 읽던 책을 꺼내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내가 꼭 들어야 했던 말을 들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아도 묵묵히 계속해나가는 것 - 이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그저 묵묵히.



07월 14일 금요일  


경험하지 않은 것에서 밑도 끝도 없이 창의력이 나오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경험에 기반해서 얻은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편이에요.
(<용감한 솔로 육아 - 내가 키운다> 김솔PD 인터뷰)

_ 장수연,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


론칭하려는 서비스가 내 마음에 도착하기 전에 두 개의 경유지가 있었다. 하나는 일회용 컵 사용을 줄이고 싶어서 기획한 텀블러를 빌려주는 서비스였고, 다른 하나는 외국인 여행객/단기체류자가 한국에 관광/거주하는 것의 불편을 덜어줄 수 있는 서비스였다. 두 서비스 모두 내 경험에서 시작한 기획이었다. 아이디어를 찾아 헤매던 시절 내가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 이 문장에서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는 밑도 끝도 없이 나오는 게 아니구나 - 내 경험에서 나올 수밖에 없구나.


두 가지 모두 고민만 많이 하고 결국 쏘아 올리지는 못했는데, 그 영역에 대한 내 경험의 한계 때문이었던 것 같다. 3-4개월쯤 고민을 하는 동안, 내가 그 영역과 한 몸이 아니어서 에너지가 떨어지는 시기가 자꾸 찾아왔었다. 이번에 비로소 론칭하려는 이 서비스는 아직 에너지가 떨어지는 그런 순간은 오지 않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7월의 밑줄(1/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