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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Aug 11. 2023

8월의 밑줄(1/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08월 07일 월요일


자기 경험을 기반한 글쓰기는 관계 속에서 나를 관찰하고 변화를 기록하는 일이다. 가족, 친구, 애인, 행인, 스승, 동료 등이 빠지지 않았나 살펴야 한다. 그들이 없으면 나를 설명할 수 없다.

_ 은유, <쓰기의 말들>, 145p


친구 J에게 1년 만에 안부 문자가 왔다. 서울이 무척 덥다는 소식을 잼버리 관련 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했다. 별 일은 없는지 물었고, 그간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문자를 보냈다. J와는 2013년 대학원을 다니면서 알게 되었는데, 네덜란드 사람들도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정이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안부를 주고받으며 10년 전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변화가 크다는 것을 인식했다. 나에게 내 변화는 워낙 천천히 흐르는 것이라 체감하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안부를 물어준 J가 고마웠다. 10년 전 내 고민을 기억하는 친구에게 10년 후 오늘의 걱정을 이야기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자 큰 변화가 있었다는 인식을 나눠 가졌다.


08월 08일 화요일


식구가 둘 뿐이어도 복숭아는 금세 사라지겠지. 접시 하나 아래에 받치고, 팔뚝에 국물(?) 줄줄 흘리며 통째로 베어 먹는 복숭아야 말로 여름의 축복이고 은혜지. 복숭아 때문에 여름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사소한 슬픔은 잊히며, 삶의 당도는 올라가겠지.

_ 안희연, <단어의 집>, 231p


입추네요. 복숭아를 먹을 수 있는 여름이 조금씩 멀어지고 선선한 가을이 가까워지네요.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이 문장을 곁에 두고 복숭아를 더 먹어야겠어요. 삶의 당도를 올려 볼래요.



08월 09일 수요일


열매는 한 여름 빛의 기억이라서 태울수록 커피는 반짝거리고 그 기억을 마셨으니 잠들 수 없지

_ 고명재, <아름과 다름을 쓰다> 부분,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15p


올여름 어떤 열매를 맺으셨나요? 흘러가버린 여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이 여름 빛의 기억을 가진 각자의 열매가 있다고 믿어요. 내년 여름에, 내후년 봄에 그 열매를 커피콩처럼 볶아서 진하게 내려 마시면 그 기억에 잠들 수 없는 밤들이 있을 거예요.


08월 10일 목요일


관계라는 건 양쪽을 연결한 종이컵 전화기 같은 것이어서, 한쪽이 놓아버리면 다른 쪽이 아무리 실을 당겨도 그전과 같은 팽팽함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_ 김연수,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 부분,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 119쪽


새벽에 이 부분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자면서 계속 생각이 났어요. 종이컵 전화기라는 비유 때문이었는지, 내쪽에서 아니면 저쪽에서 놓아버린 관계들이 떠올라서였는지 모르겠네요.


08월 11일 금요일 인증글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_ 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14p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는 가끔 이렇게 무거워집니다. 보드랍고 가볍고 싶은데 무거운 사람으로 태어났나 봐요. 생각의 수심이 깊어질수록, 답은 일상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러요. 일상의 부피가 가장 커서 그런 걸까요?


- 매일 50페이지 정도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 하나를 초속 1cm로 정성껏 쓰는 일

- 아침에 일어나서 시 한 편을 노트에 받아 적는 일

- 30분 정도 물의 부력을 느끼며 내 몸무게를 잊는 일

- 형광등 불빛으로 환한 사무실에 나와서 이성적인 척 일하는 자아를 만나는 일

- 자기 전에 다리를 벽에 기대고 부어오른 종아리를 쉬게 해주는 일

- 수다쟁이 남편 라디오를 들으면 저녁 먹고 걷는 일


늘어난 속옷처럼 평범하지만 나를 지켜주는 내 일상의 부피에 대해 오늘 아침에 생각했어요.


08월 12일 토요일  


내겐 말이 다다. 쏘아붙이거나 소리치지 않고, 나쁘게 말하지 않는 것. 말로 사람을 우선 끌어안는 것, 그게 다정함이다.

_ 박연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사주에 금이 많다. 이런 사람은 말로 사람을 자꾸 다치게 한다고 지나가다 들었다. 다 믿는 건 아니지만 찔리는 부분이 있어서 마음속에 남았다.

아침에 조용히 커피를 마시다가 남편에게 칼 같은 말을 할 것 같은 나를 목격했다. 그리고 이 문장이 떠올랐다. 무사히 얼음송곳 같은 그 말들을 끊여서 차로 만들어 대접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이었다.

이 문장을 최대한 잘게 다져서 내 마음에 집어넣으려고 또박또박 적었다. 부디 다정한 말을 하는 입술을 가지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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