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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Sep 05. 2023

8월의 밑줄(2/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08월 14일 월요일  


그것은 눈 쌓이는 소리보다 고요한데 귓속에서는 화산보다 크게 울리고 그것은 꽃 하나 없이 백리를 넘어 사람들 마음에 맹렬하고 은은한 향기를 찌른다. (...) 지금도 우리는 눈으로 그 노래를 듣는다. 우리는 그것을 시라고 한다.

_ 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134쪽


8월 초 출산방법을 제왕절개로 정했다. 좀처럼 이 사실이 근데 실감이 안나는 거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글 캘린더에 구체적인 일정을 등록한 일. 남편도 초대하고 일별 세부 일정을 정리했더니 비로소 머리에서 일괄 정리를 시작했다. 20년을 캘린더에 일정을 넣고 수행하며 살았지, 내가 이런 사람이었지, 다시 인식했다.

이렇게 해도 마음으로 받아지지가 않았다. 여전히 다른 사람 일인 것 같았다. 그러다 3일 전 고명재 시인의 산문을 읽다가 든 생각. 나 지금, 비로소 9개월의 항해를 마무리하고 신대륙에 도착하는구나. 그런 상황이구나. 배가 만들어지지 않아 3년 동안 성실하게 준비해서 오른 여정이었다. 그 여정이 끝나고 천천히 항구로 들어가는 중이구나. 출산을 5일 앞두고 드디어 내 영혼이 내 몸이 닥친 상황을 이해했다. 마음속으로 닻과 돛을 내리고 천천히 항구로 진입하는 배에 앉아 신대륙을 보고 있는 내가 보였다. 새로운 땅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모험심과 기대감이 걱정과 두려움을 이겨버렸다. 용기가 어디선가 생겨났다.

시도, 시인이 쓴 산문, 시적인 마음도 힘이 세구나. 시적이지 않은 나의 상황을 시적인 마음으로 보게 해 주는구나. 이런 것을 알게 되었다.


08월 15일 화요일


아이는 저만의 숨으로, 빛으로 여자를 지켰다. 이 세상의 어둠이 그녀에게 속삭이지 못하도록 그녀를 지켜주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저들 부모의 삶을 지키는 천사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누구도 그 천사들을 부모의 품으로부터 가로채갈 수는 없다. 누구도.

_ 최은영, <미카엘라>, 소설집 <쇼코의 미소> 중


임신부 기간 동안 행복했다. 배 밀고 다닌 이 기간이 그리울 것 같다. (과장하자면 아프리카 코끼리처럼 2년 가까이 임신하는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골반이 삐걱거리고, 소화가 안되고, 각종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영혼의 닿아 없어질 것 같은 불안한 밤들이 있었지만, 한 단어로 극단적 요약을 하자면 행복했다.

감정이 증폭되는 것이 느껴졌다. 시나 소설, 문장에 감동을 받아 눈물이 고이는 일이 잦았다. 화를 내야 할 때에 화가 나지 않았다. 마음에 보호막 같은 것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이 문장처럼 아이가 어둠에서 나를 지켜주는 신비가 느껴졌다. 이제 내가 지켜줄 차례인가 보다. 받기만 하고 해준 것이 없다. 자신은 없지만 하루하루 정성껏 해보련다.


08월 16일 수요일


인생에 이런 황홀한 ‘도착’이 몇 번이나 더 있을까.

_ 박연준, <고요한 포옹>, 24면


선물이 도착했다. 이토록 긴장된 마음으로 선물을 열어본 적이 없다. 이가 부딪힐 정도로 추운 2번 수술방이었다. 눈을 꼭 감고 배달해 주는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와 손에 집중했다. 이쯤이면 포장(!)을 다 열었을 텐데 할 때쯤. 내 인생의 선물이 울음소리로 도착을 알렸다. 곧 선물을 보자기에 귀하게 싸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볼을 가까이 대주었다. 온기로 가득 차있었다. 선물을 받고 이렇게 감격해 눈물을 흘리기는 처음이다.

2870g의 황홀한 도착.


08월 17일 목요일  


발레를 배운 뒤 좀 더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인생은 ‘몸으로’ 사는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_ 박연준, <모월모일>


1. 36시간의 금식이 끝나고 미음을 먹었다. 미음이 이렇게 맛있다고? 쌀가루 한 겹 한 겹의 맛이 느껴졌다. 쌀을 키운 햇빛의 맛까지 느껴졌다면.. 너무 과장이 심하겠지?


2. 25시간을 누워있다가 부축을 받아 두 다리로 일어섰다. 걸었다. 누워있는 세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몸의 감각. 발바닥에 느껴지는 압력. 실룩거리는 엉덩이 근육의 움직임. 몸의 자유가 이렇게 행복감을 주는구나.


3. 소변줄을 빼고, 화장실에 걸어가서 미션을 마쳤다. 뭔가를 되찾은 기분이다. 이제 다른 사람들이 내 소변 색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수술 후 1박 2일 동안 내 몸을 겪으며 인생은 ‘몸으로’ 산다는 박연준 시인의 말을 ‘몸으로’ 이해했다. 앞으로 더 몸을 소중히 해야지라는 마음을 얻었다.


08월 18일 금요일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보다 여행을 하고 있다는 걸 조금 더 앞세우는 순간, 대화는 엉켜들었다. 기념사진을 찍어가며, 여행 중이라는 증거를 어딘가에 남기려 애를 쓸수록, 곁에 있는 사람과 불화했다.

_ 김소연, <나를 뺀 세상의 전부>, 112p


어젯밤 별 것도 아닌 일로 남편을 향해 불평했다. 아침에 생각하니 너무 했다. 상대가 그 정도로 억울한 표정일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몸이 불편해서 그랬다고 핑계를 댔다. 그러다 오후에 이 문장을 읽다 깨달았네. ‘부부’보다 ‘부모의 우리‘를 너무 앞세웠던 것이다. 그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남편과 사랑하며 살아가자는 마음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앞서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08월 20일 일요일  


도착이란 것이 늘상 그런 식이었다. 도착은 하였으나 목적지는 아니다. 도착은 하였으나 다른 곳으로 출발을 해야 한다.

_ 김소연, <나를 뺀 세상의 전부>, 200쪽


퇴원하는 아침에 이 문장을 읽었다. 수요일의 문장인 황홀한 ‘도착’은 또 다른 곳으로의 출발이구나. 또 다시 이토록 당연한 것을 책을 읽으며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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