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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Nov 03. 2023

9월의 밑줄(1/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09월 04일 월요일


감격이란, 세상 모든 것들은 저만치에 있고, 오직 자기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에만 몰입할 때에 더 강하게 찾아오는 감정이다.

_ 김소연, <마음사전>, 84p


조용한 방에 전화벨이 다급하게 울린다.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마스크만 챙겨서 방문을 열고 나선다. 수유실로 들어가 수유쿠션을 배에 두르고 아기를 받아 젖을 물린다. 어설픈 내 스킬을 아기도 아는지 같이 우왕좌왕하며 아기는 배고픈 것이 더 서러워져서 더 크게 운다. 나도 같이 울고 싶다. 아니 이미 같이 울고 있다. 아기도 나도 아직은 연습 부족이라 3시간마다 이 난리 끝에 젖을 먹이고 있다.


일단 물기만 하면 아기는 세상의 평화를 다 가진 것처럼, 평화가 넘쳐서 나눠줄 수도 있을 것 같은 표정으로 작은 눈을 감고 작은 입을 오물오물 거리며 열심히 먹는다. 내 몸에 착, 밀착해서 생의 의지가 느껴지는 힘으로 젖을 먹는 아이의 모습이 감격스럽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모든 순간을 놓칠 수가 없어서. 목에 있는 모든 뼈를 늘려 고개를 빼고 그 황홀한 장면 속으로 들어간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저만치에 있고 오직 나와 너만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몰입의 감정이 밀려와 자꾸 눈물이 차오른다.


09월 05일 화요일


무언가 결정을 내리기에 일요일 오후는 나쁜 시간이다.

_프란세스코 마랄례스, 카레 산토스, <일요일의 카페> 첫 문장


왜냐하면 일요일 오후에 우리는 우리가 일상을 보내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에 머물기 때문이다.


_ 김정선, <소설의 첫 문장>, 28-29p


아기를 출산하는 주에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 개발 1차가 끝났다. 이제 꼼꼼하게 검토할 차례. 누가 조리원에 있는 동안은 바쁘지 않다고 했던가? 분명 여기서 검토를 마칠 수 있을 줄 알았다. 예상과 달리 이곳은 매우 바쁜 곳이서 (두 시간에 한 번 수유하고, 교육을 받고, 마사지 가고, 조동들과 교류도 해야 해서) 시간도 정신도 여유가 없다. 이러다 개발을 온전하게 마칠 수 있을까, 이러다 막판에 흐지부지 돼버리는 것 아니야? 일정을 미뤄야 하나? 이런 생각이 엉킨다.


몸은 역시 하던 것을 하려고 해서, 시간이 나면 컴퓨터를 켜고 웹사이트를 검토해야 하는데 책을 읽는다. 이 문장을 읽다가 깨달았다. 지금 나는 일요일 오후를 살고 있구나. 조리원에 있는 동안 나는 일상을 보내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쉽게 무언가를 결정 내리지 말아야겠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차분하게 생각해야겠다. 일요일 오후는 무언가 결정을 내리기에 나쁜 시간이야.


09월 06일 수요일


바람이 분다. 순간 깨닫는다. 바람은 부는 순간 이미 떠나고 없다는 것을. 정체를 알 수 없을 때까지만 내 곁에 머물 뿐, 아, 바람이구나 하고 느낄 때면 이미 바람은 내 곁을 떠나고 없다. 그래서 바람이다.

_ 김정선, <소설의 첫 문장>, 65p


딸은 2.6kg로 병원에서 퇴원했다. 지난 3주 동안 그렇게 성실하게 체세포를 늘리더니 오늘 아침에는 3.3kg가 되었다. 지금은 양 볼에 사탕 하나씩을 물고 팔을 올리고 자고 있다. 아기의 얼굴은 매일이 다르고 빠는 힘도 시시각각으로 세진다. 벌써 지난주 얼굴이 사라졌다. 바람처럼. 이런 얼굴이구나. 하는 순간 그 얼굴은 내 곁에 없고 아기는 새로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더 자세히보고 싶다. 지금 모습이 바람처럼 사라지기 전에.



09월 07일 목요일


처음이란 균형을 맞추는 데 가장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 시간이다.

_ 프랭크 허버트, <듄>, 첫 문장


남편이랑 같이 살고 첫 한 두 달이 생각난다. 쓰레기 분리수거, 설거지, 빨래를 건조대에 너는 법, 밥 먹는 시간, 손톱 깎는 것까지 균형이 맞지 않아 덜컹거렸다. 다음 주면 처음으로 아기와 셋이 일상을 만드는 시간이 시작한다. 우리는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두렵다.


09월 08일 금요일


하긴 ‘다시’야말로 우리네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부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다시’ 사는 사람들 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는 사람들.

_ 김정선, <소설의 첫 문장>, 85p


내 인생에 가장 좋은 것들은 ‘다시’ 사는 삶에서 왔다.


1. 체력: 17시간 동안 지리산을 종주할 수 있었던 것도, 설악산 공룡능선도 6시간 만에 완주할 수 있었던 것도, 42살에 제왕절개 수술에서 3일 만에 회복한 것도, 밤마다 아기랑 함께 깨서 수유를 할 수 있는 것도 매일 다시 또다시 운동하면서 체력을 적금처럼 쌓아 왔기에 가능했다.


2. 난임생활을 하면서 다시 사는 삶을 제대로 경험했다. ‘다시’야 말로 지난 3년의 내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부사이다. 10번 ‘다시‘ 산 결과 내 인생에 또 가장 좋은 것이 또 찾아왔다.


앞으로 난 무엇을 ‘다시’ 사는 삶을 살게 될까?


09월 09일 토요일  


별이 쓸리는 밤이었다.

_ 황순원, <카인의 후예>, 첫 문장

(...)

내가 땅 위의 눈을 쓸고 있는 동안 누군가 하늘에 비질을 했는지 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반짝였다.

_ 김정선, <소설의 첫 문장>, 128-129p


10살 때였다. 여름방학에 사촌들과 우르르 지리산에 놀러 갔다. 산 위라 한 여름인데도 추워서 자다 깼다. 엄마를 찾겠다고 텐트 밖으로 나갔다가 깜짝 놀라 섰다. 누군가 하늘에 비질을 했는지 별로 반듯하게 길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그 밤에 보았던 가지런한 은하수, 수풀 사이 날아다니던 반딧불이들. 이 문장을 읽다가 내 어린 시절 가장 돌아가고 싶은 순간에 잠시 다녀왔다.


09월 10일 일요일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다

_ 허수경, <레몬>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32p


- 조리원 마지막 날 아침이다. 이곳에 돌아오진 못할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 집에 가서 아기를 온전히 내가 돌보는 일이 기대된다. 쌓아 보자. 고운 정, 미운 정. 아무리 전문가 간호사 선생님들이었지만 엄마의 돌봄과 비교할 수 있을까?

- 아기 발을 볼 때마다 이 시의 문장이 생각난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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