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후나 Nov 03. 2023

9월의 밑줄(2/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09월 11일 월요일

겁. '나는 겁이 많아'라는 표현과 '저 사람은 겁이 없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인다. 많거나 없는 두 갈래 외에, '나는 겁이 적당한 편이야' 같은 말도 두루 사용되면 좋겠다.

_ 김소연, <한 글자 사전>, 26p


겁이 많으세요? 아니면 겁이 없으세요?

혹시 겁이 적당한 편이신가요?


09월 12일 화요일


독서는 한 자리에서 멀리 다녀오는 능동적인 행위다.

_ 박연준, <모월모일>


아기는 벌써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젖병으로 먹으면 인풋대비 아웃풋이 좋으니 어서 젖병으로 달라고 한다. 젖을 빠는 일은 너무 힘들어요. 젖병울 줘요. 쉽게 살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감정을 크게 울어 재끼는 것으로 표현한다. 모유수유를 하려고 하면 이틀에 한 번은 젖병으로 먹겠다고 직수를 완강히 거부해서 초보 엄마는 오늘도 땀을 한 바가지 흘렸다.


어찌어찌 겨우 재우고 읽던 책을 폈다. 며칠을 독서 없이 살다가 책을 펴니 종이를 넘기는 것까지 황홀했다.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저 먼 곳에 보내니 해방감도 들었다. 딱 5쪽을 읽었을 때 아기가 보채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관심의 총량은 모두 자기 것이라고 항의하는 듯 독서하며 마음을 다른 곳으로 보내지 말고 자기에게 온전히 돌아오라는 듯 떼를 부린다. 아기에게는 생존의 문제라 그럴까? 매번 느낀다. 아기는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09월 13일 수요일  


밤에 몰래 도둑질하듯, 맛난 것을 아껴 가며 핥듯이 그렇게 조금씩 글쓰기를 즐겨왔다.


_ 박완서, <모래알 만한 진실이라도>


아기가 자는 동안 몰래 도둑질하듯, 맛난 것을 아껴 가며 핥듯이 그렇게 조금씩 문장을 고르고 적었어요. 당분간은 새 책을 읽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그동안 모아둔 문장에서 나를 구해줄 문장을 골라보려고 해요.


09월 14일 목요일  

문제는 아기가 깨서 울어도 소리를 못 듣는 거라. 내가 방 안에서 몇 번이나 '새댁 아기 울어' 하고 소리 질렀다가 아차, 듣지를 못하고 수독사로 나가서 몸을 흔들어 줘야 알아채곤 했거든.

_ 김정선, <소설의 첫 문장>, 157p


아기를 낳고 처음 안아보던 날. 간호사 샘이 안겨준 아기가 울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조리원 모자동실 시간에 숨 넘어가게 우는 아기를 보고 같이 울 뻔했었지. 발을 동동 굴렀지. 그러다 울지 않는 아기 때문에 걱정하며 대학병원에도 찾아가셨다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아기가 우는 것은 건강함의 표식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우는 것에 너무 쫄지 말자고 다짐했지. 그러다 오늘 읽은 책에 귀가 들리지 않는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는 조금 눈물이 나기도 했지.


아직도 아기가 울면 마음이 곧 부서질 것 같이 얇아지지만 아주 조금씩 그것도 두꺼워지고 있다. 2.7kg 가녀린 아기가 3.7kg가 된 것처럼 아기의 볼살이 차오르는 것처럼 엄마로의 내 마음도 같이 자라고 있다. (자라고 있다고 일단 우겨볼란다.)  


09월 15일 금요일

벨에포크를 살아가는 사람은 그 시절이 벨에포크인지 어떤지 알지 못한다. 한 번의 인생이란 살아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은 뒤에야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잘 살고 싶다면 이미 살아본 인생인 양 살아가면 된다.

_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 214p


간신히 아기를 재우고 거실 소파에 누웠다. (집에 온 지 5일 만에 누워보네.) 밖에는 우리를 가을로 데려다주는 비가 내린다. 눈꺼풀이 계속 내려온다. 그래도 좀 더 누워서 빗소리를 더 듣고 싶은데... 잠을 쫓아 보지만 눈은 점점 더 감긴다. 그러다 피곤해도 지금이 내가 벨에포크를 사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는 초가을 비가 오고 나한테는 아기 토냄새가 나는 잠시 평화로운 새벽 세 시에.


09월 17일 일요일


우리의 상심이 '겉상'할 뿐인 경우도 있다. 속까지 상하지는 않은 적도 사실은 많다. '겉상했을 뿐이야'라는 표현도 두루 사용되면 좋겠다.

_ 김소연, <한 글자 사전>, 27p



매거진의 이전글 9월의 밑줄(1/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