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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Nov 03. 2023

9월의 밑줄(3/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09월 18일 월요일   


담. 높고 우람할 때는 위화감을 주지만 낮고 아담할 때는 풍경이 되어 준다.

_ 김소연, <한 글자 사전>, 93p


이 문장을 읽고 내 마음의 담에 대해 생각했다. cctv와 철사가 감긴 우람한 담을 치고 사는 건 아닌지. 제주도 돌담처럼 바람이 지나다니고 계절마다 꽃도 피는 마음의 담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09월 19일 화요일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_ 진은영, <그 머나먼> 부분   


그땐 그랬다. 멀리 있을수록 좋았다. 초등학교 때 영어를 배우고 국어보다 영어가 좋았고, 우리 동네보다 시내가 좋았고, 한식보다 양식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자주 보던 절보다 모든 게 생소했던 성당이 그래서 더 끌렸고, 한국영화보다 미국영화, 미국/영국 드라마, 알아듣지도 못하는 생소한 제3세계 음악이 좋았다.


지금은 아니다. 국어가 좋고, 한식이 좋고, 우리 동네가 좋다. 음악도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말이 좋고 어릴 땐 그렇게 시시해 보였던 우리 가족들이 좋다.


이 시를 읽으며 여기에서 멀리 있는 세계만 좋아했던 시간들이 떠올라 잠깐 책상에 앉아 멍하게 옛날 생각을 했다.


09월 20일 수요일


밤. 노동자가 비로소 온전히 오금을 펴고 눕는 시간. 창가의 식물들이 면적을 오므리는 시간. 농구공을 받아내는 텅 빈 운동장처럼 누군가의 성정이 울려 퍼지는 시간. 그렇기 때문에 시인에겐 밥물을 재는 시간.

_ 김소연, <한 글자 사전>, 162p


신생아 돌봄 노동자로 살고부터 밤이 사라졌다. 내 오금을 펴고 눕는 시간은 언제 되찾을 수 있을까? 시인들은 밥물을 재고 나는 젖병에 우유물을 잰다.


09월 21일 목요일


반. 반만 먹고 반만 잔다. 반만 일하고 반만 논다. 반만 생각하고 반만 말한다. 반만 듣고 반만 본다. 반만 살아있고 반은 죽어있다. 시를 써서 그 반마저 지워버린다.

_ 김소연, <한 글자 사전>, 160


밥 반 공기만 먹으면 속이 편하다. 반 시간만 걷는 일은 몸뿐 아니라 마음도 풀어준다. 말하는 양을 반으로 줄이면 왜 그런 싱거운 이야기를 했을까 고민할 일이 없다. 기대를 반으로 줄이면 실망은 반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어진다. 특히 나에 대한 기대. 반만 사는 인생이 온전한 인생이 아닐까 꽉 채우려다가 탈 나는 것이 아닐까, 100점 맞으려고 했다가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닐까. 50점짜리 하루가 어쩌면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09월 22일 금요일


볼. 뺨의 한가운데 부위. 어쩐지 뺨은 때리기 위한 곳 같고 볼은 뽀뽀를 하기 위한 곳 같다.

_ 김소연, <한 글자 사전>, 179p


요즘 가장 자주 보는 풍경. 아기의 볼. 매일 평균 6-7번 수유를 한 시간씩 하니까, 아기의 볼을 매일 7시간 이상 보고 있다. 작고 홀쭉했던 볼이 조금이 통통하게 올라오는 것을 보며 이 깊은 가을로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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