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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Nov 20. 2023

11월의 밑줄(2/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11월 13일 월요일


나는 카메라를 들고 실내에서 바깥을 빼꼼히 내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금세 사라지고 말 것들에 렌즈를 들이대며, 금세 사라지고 말 것들을 언제고 이렇게 부지런히 기록해 두며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_ 김소연, <시옷의 세계>, 22p


아기를 재우고 나도 자려고 누웠다. 바로 옆에 아기 침대에서 자고 있는데 사진앱을 열어서 아기 사진을 보고 있다. 바로 옆에 있어도 보고 싶구나, 한 달 전 아기 사진을 보고 이렇게 생겼었구나, 많이 컸다, 생각한다. 시인이 내리는 눈에 렌즈를 들이대며 쓴 문장을 보고 나는 아기가 자라는/금세 사라지고 말 장면들을 부지런히 기록해 두며 살아가자고 생각했다.


11월 14일 화요일  


믿음보다 의심 쪽에 기울어 살던 사람이라선지, 나는 믿음보다 의심을 더 잘 이해한다.

_ 김소연, <시옷의 세계>, 29p


어느 쪽에 더 기울어 사세요? 믿음 vs 의심?


김소연 시인처럼 저도 의심 쪽입니다.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죠. 수많은 내가 할 수 있겠어? 의 순간들이 떠올라요.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순전히 믿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특히 어릴 때 엄마가 ‘나는 너를 믿어.’ 라는 말을 자주 해주었는데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그 말이 큰 힘이 되었어요. 이 문장을 읽다가 믿음보다 의심에 더 의지하는 저를 알아채고 씁쓸해져요. 남편을 더 믿어주고, 나도 더 믿어주고, 딸에게도 나중에 자주 말하고 싶어요. ‘나는 너를 믿어.’


11월 15일 수요일


사랑하는 아이야,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렴. 날다가 힘들어 쉬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오렴

_ 윤여림,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


아가야 엄마가 많이 사랑해라고 소리 내서 말했다. 잠들었다가 깬 네가 쪽쪽이를 물고 큰 눈을 껌뻑이며 눈을 맞추고 듣고 있다. 꼭 대답을 하는 것처럼 작게 옹알이도 한다. 귀여운 옹알이 소리를 들으며 사랑한다고 몇 번 더 말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렇게 사랑하는 너를 두고 내가 죽는 그 순간에 다녀왔으니까. 너도 뭔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눈빛이 달라진다. ‘엄마 왜 울어’하고 묻는 것 같다. 거기에 나도 눈으로 답해준다. 우리 같이 사는 동안 재미있게 지내자. 모든 순간.


+ 지난주 소하님의 모닝글쓰기 리추얼에서 이 순간에 대해 썼어요. 마틸 님이 읽으시곤 이 책을 선물해 주셨어요.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 책에는 옆 방에만 있어도 혹시나 하는 지금의 제 마음부터 나중에 유치원 캠프를 떠나는 날, 더 멀리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날의 마음에 대해 나와요. 저도 마틸님처럼 나중에 이 그림책을 어린이집에 갈 아기랑 읽는 모습을 상상하며 읽고 있어요. 90일이 된 아기는 어제 처음으로 혼자 잠들었어요. 안아줘야만 잘 수 있었는데 벌써 혼자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네요. 이제 막 만났는데 왜인지 요즘은 헤어지는 날을 자주 생각해요. 그래서 이 책을 또 꺼내 봤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헤어지는 날이 아니라 오늘과 그날 사이의 날들에 마음이 가네요.


11월 16일 목요일  


자기를 긍정하는 것보다 힘센 것은 없다.

_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39페이지


가장 못하는 영역, 나를 긍정하기.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싶어, 지난 5월부터 기특한 나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이 문장을 읽고 그 기록을 열어보았다. ’<스토너> 완독 했다.’, ‘아침에 시를 읽었다.‘, ’임당검사 패쓰했다.‘, ‘아침수영’, ‘치즈케이크 참았다.’, ’나름 담담하게 출산했다.‘,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IM 1분 28초.‘, ‘남편에게 육퇴를 선물했다.’, ‘엄마에게 화내지 않았다.’ 앞으로는 어떤 것들이 이 리스트에 담길지 궁금하다. 힘이 세질 나도 궁금하다.


11월 17일 금요일  


지금 살아 있다는 것 -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_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103페이지


마음이 불편한 일이 있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차는 마셔도 밥은 먹지 않는데, 내 원칙을 배신했다. 조리원 동기모임이었다. 모두 나보다 10살은 젊고 10배는 의욕적이다. 아기들의 뇌는 아직 뒤집기도 못하는데 그녀들은 무려 교육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몬테소리를 할 거냐? 아니면 프뢰벨이냐? 문화센터는 어디로 다닐 거냐?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어떻게 할 거냐? 이런 대화에 들어와 있는 것이 어색해서 창 밖을 봤다. 집에 가고 싶었다. 표정을 숨기지 못해서 그녀들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그 시간이 너무 불편했다고, 소화도 안 된다고 몇 시간 동안 불평을 했다. 기절하듯 축 늘어져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려고도 했다. 그러다 이 문장을 읽고 불평을 멈췄다. 예쁘게 자고 있는 아기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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