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됨을 알고 지혜를 구하는 자세
@박노해님의 '걷는 독서'
"VUCA 시대, 불확실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서는 '학습'하는 능력이 필수이다"
"이 시대의 공정- 옳고 그름을 가려보자. 손해보고 살 수 없다."
"나는 문제없다, 이 조직이, 저 사람이 문제지."
나는 조직개발 컨설턴트이면서 퍼실리테이터이다. 내가 하는 일은 조직 안에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또 서로에 대한 이해를 소통을 통해 증진시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이 일을 한다고 해서 내가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늘 넘어진다. 그렇게 살아내기 위해서 치열하게 부딪히며 살아간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생존의 키워드, 학습과 성장
많은 조직에서 "학습과 성장"을 강조한다. 이는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생존 키워드이기도 하다. 학습의 모양, 학습하는 행동을 강조하더라도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마인드셋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이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인식(Self-awareness)을 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한 가지만 아는 사람은 그 한 가지의 세계를 전부로 여기고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컨설턴트라는 직업인으로서는 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지속해서 해야만 하는 숙명을 지닌다. 일단 학습을 시작하게 되면, 우리는 내가 알던 것을 의심해보는 과정을 겪게도 되고, 또 나의 세계라는 '알'을 깨면서 자기 부정을 경험하게 되기도 하고, 그렇게 나의 작음과 세계의 넓음을 깨달으면서 한층 지식의 깊이가 깊어지게 된다.
이 학습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신념이 무엇이 바뀌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아 이래서 작동하지 않았구나, 아 이럴 수도 있구나.' 이런 마음 속에 생각의 변화를 확인하는 것이 알을 깨는 과정, 자기 학습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측면에서 이 과정은 우리가 학창시절에 단순히 암기하듯 '공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학습하다 學習 , learning
교육학 사전에는 학습을 "연습이나 경험의 결과 일어나는 행동의 지속적인 변화"라고 정의한다. 정의를 해석해보자면 결과적인 측면에 보다 촛점이 맞춰져있다. 무엇을 해서 얻어지는 결과 또는 변화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각의 변화, 즉 신념의 변화라는 정리를 해본다. 그럴 때 지속적으로 변화의 의지가 생겨나고, Why를 학습 중 '진실의 순간'에서 스스로 만났기 때문에 긍정적인 결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이런 학습을 나는 '연구하다 또는 궁리하다'라고 표현한다. 연구와 궁리는 이렇게 저렇게 몰입(flow)하여 생각해보고, 방법을 찾아 시도해보는 행위인데, 대상에 대한 '궁금함(호기심)'과 '겸손함' 없이는 이를 지속해가기 어렵다.
겸손은 학습의 마인드셋
나는 겸손하지 못했다. 요 근래 얼마간 '공정'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내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분명한 사실과 룰을 기반으로, 보이는 결과를 기준으로, 얼마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였는지 나의 나됨을 잊으니 분노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을 내 스스로 경험한 셈이다. 그런데 공정의 심판관은 누구일까? 내가 심판관의 자리에 있을 때 학습은 일어나기 힘들다. 이미 결정이 끝났기 때문에 들을 이유도, 물을 이유도, 방법을 찾아볼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것으로, 나의 옳음으로 가득차 있으면 다른 생각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들어올 공간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here and now,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공간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
어쩌면 내 문제일 수도 있다
세상 가장 간편한 문제 해결은 모든 문제를 타자, 타인에게 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심리적으로 불편한 이 상태에서 빠르게 탈출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시작을 따져볼 때, 그것의 영향을 따져볼 때 과연 나는 거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가?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비효과,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내가 끼쳤을 부분이 있다면 나는 거기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다. 연대의식은 여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많은 조직에서 부르짖는 심리적 안전감도 깊이 파보면 이 연대와 관련성이 높다. 공동의 책임감을 스스로 느낄 때 서로를 탓하기 보다는 함께 학습하게 된다. 탓하는 핑퐁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무슨 일이 벌어진 것(what's the story)인지 서로 대화하고 개선안을 마련하고 다음 번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주의하기 위한 약속을 한다. 이를 실리콘벨리, 에어비엔비에서는 "비난하지 않는 포스트 모템"으로 시스템화하고 실제로 구현하고 있다.
겸손은 겸손해야지 해서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어느 명예에 올라 있고, 그 분야에 전문성이 있고,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알아줄수록 내 안에 차오르는 무엇은 나의 나됨을 가리기 쉽다. 그래도 명색이 00인데 다 알아야만 할 것 같지만, 내가 아는 것은 광활한 우주라는 세계에서 이 한 부분에 불과하다. 내가 안다고 하는 이것도, 심지어 우리가 부르는 과학 이론과 진리라고 하는 것들 마저도 현재는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지만 변화될 수 있는 잠재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침의 안개와 같을 수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때, 명예에 상관없이, 전문성과 인정에 상관없이 스스로의 눈을 가리는 것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내가 그렇게 해야지 노력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내가 정말로 아 그렇구나, 깨닫지 않으면, 참고 노력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온다. 어떤 이유로든 높아지는 상황에 처하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어깨가 올라가기 마련이니까. 이 자연스러움을 억지로 거슬러야 하는데 한계(고통)가 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우리의 존재를 직시하는 것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려운 한계를 가진 존재다. 존재가 그렇다. 선입견, 편견, 그리고 맥락을 다 알지 못하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내가 봤어!라고 해도 다 보지 못했을 수 있고, 내가 분명히 들었어!라고 해도 다 듣지 못했을 수 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다. 그리고 관계에 있어서도, 내가 나의 허물과 나됨을 늘 하나님 앞에서 발견한다면 내가 누구의 허물을 들추어 심판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깊이 깨닫는다.
조직 속의 다양한 의견들, 이 목소리들은 그들의 존재, 생명을 대변하고, 나는 그 일을 건강하게 다루어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보면, 나는 의견이라는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고 있고, 의사와 같은 일을 한다고 말을 한다. 실제로 진찰(진단)하고, 솔루션을 도출하고 하는 과정이 유사한데 방식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답을 내가 안주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발견하도록 함께 참여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다르지 않나 이따금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가 가진 한계 앞에서 겸손한다는 것(willingness to be Vulnerable)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가진 한계를 다루어갈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좀 더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갖게 도와준다. 어쩌면 세계를 풀어가는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지혜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왜 이렇게 나의 약함이 다 철저하게 드러난 이후에야 내가 얼마나 높아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지, 이 작은 것 하나 붙들고 전부인 것처럼 지키고 있던 나의 모습을 보니 내가 얼마나 작은 사람이었는지를 깨닫는다. 나의 세계를 넓혀가는 것은, 타인의 세계를 넓혀가는 과정보다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한다. 그럴 때 진정으로, 제대로 도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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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로 살아가는 과정, 이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자연과 역행하는 치열한 삶의 여정에서, 내 힘과 의지로 되지 않는 것을 겸손히 고백하며, 도우심을 구하는 밤입니다. 각자의 현장에서 그렇게 살아보고자 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진심으로 응원을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