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작년 11월 코로나로 촉발된 기침이 해를 넘기더니 계절이 바뀐 지금까지도 괴롭히고 있다. 사이사이에 약을 먹으면 잠시 숨 고르기를 하듯 멈추다가 약을 끊고 며칠이 지나면 다시 시작되는 기침은 밤에 특히 심해져서 안 그래도 숙면이 힘든 나를 더욱 힘들게 한다.
새로운 단지에 개원한 소아청소년과와 내과를 함께 보는 병원의 처방에 불신이 생기기 시작할 때, 같은 층에 이비인후과가 문을 열었다. 마음먹고 새 병원을 찾았다.
아뿔싸! 병원 안은 사람들로 바글댔다. 나의 대기번호는 34번. 언제 의사를 만날지 아득했지만 만성적인 기침을 떨구려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마침 저 끝 구석에 앉아있던 사람이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가서 그가 앉았던 자리에 덥석 앉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가져올걸... 휴대폰은 있는데 돋보기를 두고 왔네! 기다리며 무엇을 하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음... 그래, 구경 중 제일 재미있다는 사람구경이나 하자!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목적으로 함께 있는 최소 서른 명 이상의 사람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대부분은 짐작하듯 휴대폰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자세로 모자를 꾹 눌러쓰고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젊은 남자는 잠깐씩 다리를 떨다가 말다를 반복했고, 운동복 차림의 슬리퍼를 신은 여학생은 겉옷을 끌어안고 앉았다. 무표정의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 한분도 반대편 구석에 앉아 미동 없이 폰을 보고 계셨다.
어리다 싶은 아이를 혼자 데리고 온 아이엄마 옆에는 아이만 한 가방이 한 자리 차지했다. 나처럼 약이 효과가 없었는지 소아과에 있어야 할 아이들이 제법 많아 문득 보면 여기가 소아과인지 이비인후과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다.
어쨌든 나는 아이들을 오래 그리고 많이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다채로웠다. 학교나 혹은 유치원을 가지 않는 날이어서인지 어제 엄마가 묶어준 양쪽 머리를 그대로 한채 늦잠을 자다가 아빠 손에 이끌려 나온 꼬마가 귀여웠다. 고무줄에 힘이 빠져 묶은 머리의 양끝이 호리병처럼 우스웠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언니랑 떠들어댔다. 엄마 손을 잡고 왔다면 저렇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모처럼 쉬는 날 아내에게 받은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배가 살짝 나온 아빠가 아직도 잠이 부족한 듯 하품을 하고 눈도 비볐다. 비치된 동화책은 초라했지만 몇 명이 그 가운데 한 권씩 골라 제자리로 왔다. 걸음마를 막 뗀 아기가 아장아장 들어왔다. 뒤따르는 할머니와 함께 왔나 했더니 곧 엄마와 아빠가 줄줄이 따라온다. 온 가족의 출동이다. 옷차림이 단정한 것을 보니 아마도 나들이 전에 병원부터 들린 것 같다.
사람구경 중 수시로 순번 알림 모니터를 보았다. 내 이름의 가운데를 별표로 찍은 숫자가 여전히 느리게 바뀌고는 있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 반이 지났다. 내 앞에 일곱 명이 남아있고 내 뒤로 스물일곱 명 정도가 있을 때 접수대에서 마감 표지판을 데스크에 세웠다. 그 이후 도착한 몇몇 사람은 벌써 마감되었음을 한번 더 확인하고는 군 소리 없이 발길을 돌렸다.
시간이 또 흘러 다음다음이 내 차례일 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병원에 왔다. 마감 표지를 보더니 진료마감시간 5분밖에 늦지 않았다며 제법 목소리를 높였다. 진료를 받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료받을 권리를 호통치듯 주장했다. 그러자 못 이기겠는지 수납원이 접수를 받아주었다. 가장 늦게 온 그 두 명은 십오 분 만에 진료를 받게 될 것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짧은 사이에 이런저런 생각이 스쳤다. 이 병원에 원칙은 있는가? 목소리가 크면 통하나? 접수를 한 직원은 잘못한 것인가? 마감을 확인하고 돌아간 사람들은 바보인가? 나는 부러워하고 있는가? 나와는 정말 상관없는 일인가? 이런 불편한 마음이 들 때 간호사가 이름을 불러 나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젊은 편이었다. 자그마한 몸집에 자신감 넘치는 말투는 신뢰를 보탰다. 나의 병력인 메니에르 증후군에는 관심을 보였으나 램수면 행동장애에는 별 말이 없었고 역류성 식도염을 말하자 깊은 목 속을 관찰하고 사진을 찍어 보여주며 역류성 후두염까지 진행되었다고 말했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평소 약했던 부분이 더 나빠질 수 있는데 제대로 진단받지 못해서 오래 고생을 한 것 같다며 좋아질 수 있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후두 촬영까지 더해져 5분이 걸렸다. 거의 두 시간 걸려서 받은 진료였지만 끝나고 약 타고 집에 갈 수 있어 좋았다. 새 병원의 의사는 쉴 새 없이 환자를 보고 있으니 좋을까 안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