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기도 전에 닫았던 눈꺼풀 속까지 햇빛이 들어찬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기계가 움직이는 일정한 소리. 착착 접혀 들어가는 조각들. 더 이상 눈을 감고 있을 수만은 없는 과한 일조량에 졸음과 싸워가며 눈을 떠본다.
천장 가득한 유리 창문을 서서히 드러내며 걷히는 블라인드 덕분에 파아란 하늘이 모습을 보인다. 하늘의 색은 하늘만의 색이 있다. 바다와도 다르고 아무리 예쁜 색의 물감이나 보석과도 다르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뻥 뚫리듯 시원하고 청량하다. 맛을 볼 수 있다면 한 모금만으로도 모든 갈증이 날아갈 것만 같고, 만질 수 있다면 손 안 가득 찰랑이면서도 쫄깃쫄깃해서 마냥 가지고 놀고만 싶다.
한숨을 크게 쉬어본다. 그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졸음이 날아가 개운해진다. 이제 막 새벽이 끝난 아침의 맑은 하늘. 예쁘다. 툭-
응?
아침을 가득 즐기고 있는 나의 낭만에 누가 똥을 싸질렀나. 분위기나 기분을 망쳤다는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똥'. 조금만 늦게 일어났다면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그것도 웬 먹구름이 한 점 둥둥 떠있냐고 생각할 법한 하얀데 거무스름한 똥.
날개를 퍼덕이다가 유리창 살에 살포시 앉은 저 새 좀 봐라. 남의 아침 낭만에 똥을 질러놨으면서 태평하게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여유롭게 세상을 구경하는 꼴이라니. 참새는 아니고, 비둘기도 아니고. 까마귀는 절대 아니고. 꼬리가 길고 뾰족하게 생긴 거나 털 색깔이 까치 같기는 한데 까치치고는 몸집이 작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새일까?
안 궁금하다. 알 바냐고. 저 새가 싼 똥이나 어서 빨리 닦아버리고 싶다. 천장이 꽤 높아서 침대에 서건 의자를 가져다가 서건 창문에 손이 닿기엔 택도 없을 것이고, 애초에 저 관상용 창문은 열리지 않는다고 첫날부터 듣지 않았나. 밖에서 건물을 손수 타 올라가는 게 답이겠다. 사다리가 있을까? 2층짜리 건물을 오를 만큼 크고 높은 사다리가 있나? 위험하진 않을까? 그러다 떨어지면, 죽지는 않겠지만 어디 하나 부러질 수도 있겠다. 아프겠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휴지나 물티슈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깨우쳤다. 나는 이 펜션의 손님인데 왜 당연히 손수 닦을 생각부터 했을까? 관리자한테 닦아달라고 해야지. 물론 누군가한테 뭔가를 요구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움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내 성격이다. 벌써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래도 천장 가득 낸 창문이 이 펜션의 자랑이니 더러우면 닦아달라고 말하는 게 소비자로서 요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거니와, 손님이 남의 집 지붕에 직접 올라 새똥을 닦는 것도 집주인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암. 그렇고 말고. 머리 위에 새똥을 두고는 앞으로 얌전히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잠에서 깬 김에 조식도 먹으러 갈 겸 나갈 채비를 했다.
잠옷 위에 가디건을 입고, 1층으로 내려가 세수와 양치를 간단하게 해치워준 뒤 바로 현관문으로 갔다. 화장실에서 바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뒷문이 있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지만 이미 현관문 앞에 섰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고. 근데 밖으로 나가질 못하겠다. 내 눈이 의심스러워 손등으로 벅벅 비벼봤지만 내가 보고 있는 건 내가 보고 있는 대로가 맞다.
현관문 옆 메모보드.
어제 전부가 직접 가져다준 라면과 김밥을 맛있게 먹고, 또 친절히 수거까지 해준 전부를 배웅해주고, 현관문을 닫고 보니 자연스레 메모보드를 봤다. 맞다. 이게 있었지?
< ㅁ 아주 오래 산책하기 > 비어있던 네모칸에 자신 있게 체크 표시를 그었었다. 설령 집 앞에서 저기 다리까지 2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지만 그 거리를 해가 질 때까지 주구장창 걸었는데 이게 아주 오래 한 산책이 아니면 뭐란 말이야. 게다가 개랑 같이 걷는 걸 산책이라고 부르잖는가. 어제보다 확신에 차서 크게 체크한 걸 뿌듯하게 보면서 내심 내일은 뭐가 적혀있을까 궁금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 들었었다.
근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걸, 닥친 상황을 이해하는데 들이는 시간만큼 시야에 가득 차는 저것.
누구야. 누가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가로선 여러 개를 직직 그어버리고, 그것도 모질라 빈 공간에 '실패'를 저토록 험하게 갈겨쓴 거야? 그것도 느낌표를 세 개나 붙일 정도로 뭐가 불만인 건데?
눈이 질끈 감긴다. 절로 입술이 한도 끝도 없이 튀어나온다. 분하다. 아니? 억울하다. 아니? 속상하다. 이거 누가 썼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쓸 만한 사람이 전부밖에 없다. 전부 말고는 쓸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없다. 연세 지긋하신 사장님이 쓰셨겠어, 아님 코빼기도 본 적 없는 안 프로겠어.
생각할수록 범인은 이놈의 요정펜션의 관리실장 전부다. 전부뿐이다. 왜 자꾸 손님이 버젓이 있는 객실을 허락도 없이, 요청도 없이 들락날락거리는지 모르겠다. 성격이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다시 말하면 처음 본 사람한테도 수시로 장난을 칠 정도로 허물없는 성격인가 본데. 덕분에 그래서 좀 친해진 것도 있겠지만 이건 정말 아니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집에 들어와서 소박한 미션을 주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누구 마음대로 실패래. 그게 무슨 못된 심보야?
그리고 어제 마을회관 갔었다며. 내가 산책을 짧게 했는지 오래 했는지, 곰탱이 뒤꽁무니만 쫓았는지 자연을 만끽하며 산책을 즐겼는지 마을회관 가서 시간을 지체시킨 사람이 뭘 안다고 평가야?
신경질이 확 나서 냅다 초기화 버튼을 눌렀다. 처음 눌렀을 때 이미 메모보드는 깨끗해졌지만 성에 차지 않아 몇 번이고 버튼을 꾹꾹 눌러댔다. 한 백 번쯤 눌렀나.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이번엔 보드 옆구리에 붙은 펜을 떼어 슥슥 적었다.
< 새똥이나 닦아주시지? >
전부에게 직접 말할 거기도 하고,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따지기도 해볼 거지만 막상 내 손으로 써내린 저 문구가 꽤 마음에 든다. 덕분에 속상함에 툭 튀어나왔던 입술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침부터 참 별 일이 다 있다며 이제 컨테이너로 가볼까- 하던 그때였다.
푸드덕-하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거센 바람이 일었다. 이 바람과 내 정수리를 발판 삼아 뛴 것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벽 여기저기를 쳐대며 활개를 치고 있다. 우당탕-
"꺄아아아악!"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입에선 비명이 내질러졌고,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고 싶다며 눈을 질끈 감고 집 밖으로 내달려 나갔다. 몸에 뭘 뒤집어쓴 것도 없는데 방방 뛰면서 몸을 털어댔다.
어제와는 다른 느낌의 두려움이었다. 어제는 당장에 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자괴감에서 비롯된 두려움이었다면, 오늘의 두려움은 좀 더 원초적인 겁이었다. 봐선 안 될 것을 봐버린 충격.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긴 답답함.
"째익- 째익-"
그리고 분명 이 집 천장, 그것도 창문 바깥에 있었던 그 이름 모를 새가 왜 갑자기 집 안에 들어가버린 건지 모를 당혹감과 얼른 내보내지 않으면 집 안에도 똥을 쌀지도 모르겠다는 초조함이 이어졌다. 온갖 감정이란 감정은 다 끌어와 느끼고 있는 아주 총체적 난국인 것이다. 벌레도 못 잡는 내가 감히 저 새를 무사히 내쫓을 수 있을까? 그럴 리가.
하지만... 그래도 잡아야 한다. 쫓아내야 한다. 안 그러면 이제 겨우 사흘도 살지 못한 저 집에서의 한 달 살기는 끝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슬금슬금 문가로 다가가본다. 새는 싱크대에 자리를 잡고 자기 겨드랑이를 쪼며 몸단장을 하고 있다. 날개 달린 동물을 둔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손으로 직접 잡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 진작에 포기하고, 나는 충격 요법을 택했다. 그래도 새보다 몸이 몇 배나 큰데 인간이 무섭게 굴면 도망가겠지.
굳게 마음을 먹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두 팔을 위로 들어 위협하듯이 새를 향해 돌진했다. 지깟게 별 수 있겠냐고 역시나 크게 놀란 새가 또다시 날개를 퍼덕이며 여기 벽 저기 벽을 날아다닌다. 차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서 질끈 감은 눈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허공에 휘휘 팔을 젓고 있는 사이에 새를 문쪽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퍼더덕거리는 소리는 내 머리 위를 향해 날아갔다. 눈을 뜬 찰나에 계단 위로 날아가는 형체를 봐버렸다. 젠장. 떡하니 문을 열어놨더니 집 밖으로는 안 나가고 계단 위로 날아갔다. 도무지 2층으로 올라가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를 용기가 안 난다.
망연자실을 느낄 새도 없이 그냥 밖으로 나가 곧장 컨테이너로 달렸다. 새가 천장에 난 창문에 박치기를 하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창문을 깨서라도 내보내주고 싶었다. 저러다 창문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죽어있으면 어쩌나. 첫 만남에 똥을 싸질렀다며 싫은 내색을 실컷 내보였던 것을 진심으로 사죄할 테니 목숨만 부지하고 있어달라며 속으로 빌면서 눈으로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을 찾았다.
컨테이너를 향했던 눈이 주차장터를 향하면서 몸에 힘이 풀리며 멈춰 섰다.
오늘도 사장님의 검은색 픽업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처음 보는 차가 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크기의 바퀴를 단 새빨간 색의 지프차. 비가 내리지도 않는 맑은 날, 지프차 주위로 물이 뿌려진다. 차 뒤에서 앞으로,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물이 뿌려지면서 아주 인위적인 흐름으로 공중에 궤도를 그린다. 물이 뿌려지는 근원이 점점 뒤에서 앞으로 넘어오며 모습을 드러낸다. 여자다.
엉킨 호스를 풀면서 세차 중인 이 여자를 나는 단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본 사람이었음에도 말이다.
검게 출렁이는 밤바다의 파도처럼 긴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품이 큰 까만 가죽점퍼와 바지를 입고, 화룡정점으로 시커먼 선글라스를 쓴 이 여자가 바로 안 프로라고.
"안 프로?"
내내 이름뿐이었던 여자를 불러본다. 하지만 여자는 내 부름을 듣지 못한 듯하다.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익숙한 듯 지루한 듯한 몸짓으로 차체 여기저기에 호스를 겨냥하고 있다.
운전석 사이드미러를 향하던 몸을 보닛으로 넘겼을 때, 비로소 내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갔나보다.
옅은 복숭아색 립스틱이 발린 입술이 씨익- 올라간다. 호스를 쥐지 않는 손으로 선글라스를 벗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