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 안에 보이는 광경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었다. 분명 아침에 화장실을 쓸 때만 해도 밖으로 바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눈치를 전혀 채지 못했다. 어안이 벙벙해 넋을 놓고 화장실과 문을 쳐다보는 내게 전부가 말했다.
“아침에 내가 말했죠? 우리 사장님이 이런 거 좋아한다고.”
“사소한 것까지 정성들인다던 거요?”
“개울에서 놀고 바로 씻을 수 있으면 좋잖아요.”
아, 그런 의미의 정성? 하긴 그렇겠다. 현관으로 들어가면 화장실까지 그래도 거리가 있으니 개울에서 놀고 씻으려면 바닥이 몸에서 떨어진 개울물로 흥건해지겠다. 물놀이한 뒤 바로 씻어 뽀송뽀송한 상태로 집 안에 늘어지면 기분이 좋긴 하겠다. 나도 물놀이나 해볼까? 여름도 다 지났는데 물이 차가우려나.
“거울 선반 안에 배쓰밤도 있으니까 쓰고 싶으면 써요."
배쓰밤이란 말에 귀가 쫑긋해진다. 집에 욕조가 없어서 그랬지, 알록달록하고 향이 좋은 배쓰밤을 풀고 스파를 즐기는 걸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스파 하나 즐기려고 돈 십만 원 들여서 하루뿐인 숙박을 질길 여유가 없어서 돈이 생기면, 삶이 안정화가 되면 제일 먼저 받는 돈으로 호캉스를 즐겨야지, 그때 해야지- 해야지- 그렇게 미룬 게 벌써 몇 년이 지났는지 기억도 안 난다.
벌써 신난 나를 보며 전부가 또 싱글생글. 좋아할 줄 알았다는 표정에 내심을 들켜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이 펜션을 하나하나 다 마음에 들어하는 나를 놓치지 않는 전부가 고맙기도 하다. 아마 이 사람은 서비스업이 천직이겠다.
“참. 혹시 배 안 고파요? 조식 말고 지금까지 굶었죠? 감사의 의미로 오늘 저녁은 제가 쏠게요."
“사양 않고 넙죽 감사히 받겠습니다.”
“뭐 드실래요?"
“이것도 물놀이라고 치고, 물놀이엔 라면이죠.”
“그럼 라면에 김밥이랑 음료수까지 세트로 객실까지 배달해드릴게요. 음료수는 뭘로 드릴까요?”
“사이다로 부탁드립니다.”
“오케이. 한 시간 뒤에 올 테니까 편안하게 쉬어요.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요."
뒤돌아 가려는 전부에게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 싶어 서둘러 말을 꺼냈다.
“저야말로… 아까 와줘서 고마웠어요. 그때 개울에서 엄청 무서웠거든요.”
맞는 말이었다고는 해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과하게 화를 낸 것 같아 내내 마음이 찝찝했었다. 전부의 입장에서 해명할 거 다 말하고 고맙다- 미안하다- 할 말도 다 했는데, 나도 할 말은 해야지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다.
전부가 또 수상할 정도로 다정하게 웃는다. 설마 또…
“그 말은 가로등한테 해달라니깐요? 가로등이 어찌나 간절하게 깜빡깜빡 거렸는지.”
역시 또 가로등 타령이다. 몇 번 듣지도 않았는데 지레 질려버렸다.
“아, 또 그 소리. 이제 보니까 고장난 게 한둘이 아닌가 보네요."
“믿거나 말거나라니깐요~ 이따 올게요.”
실없는 소리를 툭 던지곤 전부는 그렇게 떠났다. 믿거나 말거나-라니. 어차피 진짜라고 해도 믿지도 않을 거였지만, 믿지 않는 사람한테 장난이라고 한 마디 해주는 게 어디 그렇게 덧나나. 꼭 저렇게 긴가민가한 말을 해서 사람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어야 하냐는 말이다. 그게 어떤 말이든 저는 그냥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말과 함께 남겨진 사람은 그 말을 계속 곱씹게 된단 말이지. 유부녀가 가정을 버릴 정도로 꼬신 솜씨가 저런 건가?
뒷문을 닫으며 단념해본다. 얼른 욕조 가득 담도록 물이나 틀어야지. 세찬 수압을 뽐내며 물이 콸콸콸 흘러나오는 걸 욕조 가에 앉아 감상해본다. 바닥을 때리던 물줄기는 금방 차오른 수면에 동그란 파동을 일으킨다. 성인 둘이 나란히 누워도 될 정도로 꽤 넓은 욕조 안에 물이 금세 차오른다. 시끄럽던 물줄기와 수면의 마찰음이 이젠 자연스럽다. 높아지는 수면이 물줄기를 집어삼키고 있다.
아무리 딴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다시금 떠오르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뭐? 가로등이 알려줘? SOS 모스부호였어? 참나. 그럼 뭐. 아까 물속에 있던 시커먼 것도 정말 물귀신이었다고 하지?
싸아-
막상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당시만 해도 아무것도 보지 않았던 기억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까맣기만 했던 수면에서 정말로 어떤 것이 보이는 것만도 같다. 곰탱이가 정확히 보고 짖어댔던 부분에 개울보다 머리가 높은 바위가 절반 정도 솟아오른 것 같기도 하다.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봤다고 해도 그게 바위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아닌가. 정말 그게 바위였을까? 바위치고는 어스름한 하늘빛 보다도 색이 더 어두웠던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사람의 머리카락처럼.
기억 속 그때의 장면이 자꾸 선명해진다. 우느라고, 소리를 지르느라고, 곰탱이를 들어안고 있느라고 자세히 보지 못한 것이 점점. 바위는 어느새 머리카락을 앞으로 넘겨 얼굴을 가린 사람의 머리가 돼있고, 수면에서 날 올려다보는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하게 사람의 이목구비가 보이는 것 같다.
어휴, 소름 끼쳐. 내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나. 하얗고 굴곡진 욕조가 아닌, 옛날 목욕탕에서나 볼 법한 타일로 지어진 욕조를 가정집에서 본 건 처음이라 그런가. 그것도 밝지만 회색 타일로 짜인 욕조라서 물을 받으면 받을수록 물 안의 색이 어두워진다. 그래서 아까 개울에서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만 망상을 하고 있나보다. 그럴 만도 한 게, 어제 처음 이곳에 와서 귀신 얘기를 대체 몇 번이나 들었는지. 제발 귀신 좀 봐달라고 사정사정하는 꼴이 아닌가.
웃음이 난다. 귀신은 무슨 종교도 없는 내가 보지도 않은 것을 본 것처럼 기억을 헤집어놓기까지 하다니. 아무래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심신이 많이 나약해졌나보다. 됐다. 목욕이나 하자.
입은 채로 차갑게 마르고 있던 찝찝한 옷을 힘겹게 벗어던지고 욕조에 발을 담그려던 그때, 아차- 배쓰밤이 있댔지? 얼른 거울 선반을 밀어 열었다.
곱게 개인 하얀 수건이 맨 위 한 칸 가득 꽂혀있고, 제일 높이가 큰 맨 아래 칸엔 딱 맞는 사이즈의 바구니 안에 스킨케어 제품들이 들어있었다. 안 프로가 직접 쓰는 건지, 아니면 손님들 중에 스킨케어 제품을 가져오지 않은 나 같은 사람들더러 자유롭게 쓰라는 건지. 포장을 뜯지 않은 칫솔들과 비누들이 여러 개 함께 들어있는 걸 보면 손님용은 아닌 것 같다. 아마 안 프로가 까먹고 안 치운 것이나, 장박 손님인 내가 일회용 어메니티를 자꾸 달랄까봐 그냥 왕창 줘버린 것이나. 어느 쪽이든 손님 입장에선 썩 좋은 기분은 안 든다. 어쨌든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가운데 칸에 배쓰밤이 좌르륵 놓여있다. '좌르륵'이란 표현이 무색하지 않게 동그란 알사탕 모양의 배쓰밤 6개가 거치대 위에 일렬로 진열되어 있다. 흔히 매장에서 구매하는 배쓰밤에 절반 조금 안 되는 소박한 크기지만 매번 주먹보다 큰 배쓰밤을 욕조 한 번에 쓰는 게 아까워서 세 번 네 번 그러다 온몸이 퉁퉁 불 때까지 스파를 즐기던 걸 생각하면 한 번 쓰기에 딱 좋은 사이즈. 게다가 이 배쓰밤들은 모두 색이 다르다. 각각 세 개의 색이 어설프게 섞여있지만 그 조합이 모두 다른 게 설마 하나하나 다 다른 향이 나는지 냄새를 맡아봐야겠다.
냄새가 다르다. 모두 다른 배쓰밤들이다. 사실 냄새를 맡아볼 필요도 없었다. 배쓰밤들 앞에는 각각의 카드가 세워져 있었다. 이 카드를 보고도 의심스러워 냄새를 맡아본 것인데 모두 다른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카드의 내용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카드엔 각각의 배쓰밤을 만들 때 사용된 아로마오일의 종류와 그 오일의 효능이 간단하게, 그리고 아주 정갈한 글씨로 쓰여있었다.
세상에. 직접 만든 배쓰밤이라니. 시중에서 본 적이 없는 사이즈인 것이 또한 이해가 된다. 물론 배쓰밤을 만드는 게 별로 어렵지는 않은 걸로 알고, 나도 스파를 좋아해서 많이 찾아봤지만 번거로움을 이겨내면서까지 손님에게 이런 걸 제공하는 건 다른 의미가 있다. 설령 내가 묵고 있는 펜션이 안 프로가 사는 집이라서 자기가 쓰려고 만든 배쓰밤이라고 하면, 애초에 전부가 직접 배쓰밤을 쓰라고 먼저 말을 꺼낸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다. 이건 정말 손님더러 쓰라고 준 것이다.
[사용된 아로마오일 : 라벤더 / 효능 : 심신안정]이라는 배쓰밤을 꺼내 벌써 다 받은 욕조물속에 톡- 떨어뜨렸다. 넣는 즉시 탄산이 일면서 배쓰밤은 부서지고 향기로운 내음이 은은하게 퍼지고 물 색깔은 노랗고 보랗고 분홍한 색깔이 사르르 흐른다. 그 안에 몸을 담그자마자 따뜻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이다. 하루종일 고생한 걸 단 한 번에 보상받고 있다.
이럴 때 꼭 해야 하는 게 있다. 한숨을 섞어 크게 소리 내기. 으어-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정성 들이는 거. 우리 사장님 그런 거 좋아해요.’
안 프로는 아무래도 대단한 변태일 것이다. 펜션에 미친 변태. 이런 서비스를 즐기다보면 비밀유지각서를 쓰도록 강요한 것도 이해는 안 돼도 별 상관없게 되겠다. 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 처음 통화를 나눴을 때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건지 재수없게만 느껴졌던 안 프로가 이젠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실질적인 사장이면서 상주하지 않는 건 본업이 있다는 거겠지? 어떤 본업일까? 어쩌면 아기자기하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챙기는 걸 좋아하는 게 어떤 공방을 운영하는 사람이지는 않을까. 비누나 화장품 만드는 원데이클래스를 하는 공방이라던가, 아니면 빵 잘 만드는 카페 사장이라던가. 혹시 모른다. 펜션이 여기뿐만이 아니어서 날을 정해놓고 돌아다니는 것일지도?
어쨌든 안 프로가 하는 어디든 가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만만찮은 변태인가보다. 봐. 스파 하나에 오늘 하루 있었던 안 좋은 일을 모두 잊어버렸다. 아무래도 상관없게 됐다. 안 프로는 여기 언제 올까? 전부에게 물어볼까? 아니, 됐다. 그 정도로 관심 갖고 싶지 않다. 이건 내 남은 자존심이다. 흥.
껌뻑껌뻑-
화장실 전등이 깜빡인다. 뭐야. 여긴 다 좋은데 하나씩 하자가 있다. 벌써 깜빡이는 전등을 두 개나 발견했다. 에헤이. 이럼 못 쓴다. 아직 한 달은 더 여기 묵을 건데, 벌써 이렇게 하자가 생기면 어쩌나.
꽤 몸도 녹였겠다- 배도 고프겠다- 전부가 식사를 가져다준다던 시간이 얼추 된 것 같으니 욕조에서 몸을 일으킨다. 샤워기로 대충 몸을 물로 헹구고 수건으로 툭툭툭- 그러고보니 거울선반 맞은편 벽에 하얀 샤워가운이 걸려있던 것을 냉큼 입어본다. 보들보들하다. 보들보들한 수건과 가운이 너무 좋다.
2층으로 올라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성큼성큼 내려가자. 똑똑똑- 하며 노크소리가 들렸으니. 역시나 몸을 다 말리지도 않아 금방 쌀쌀해졌지만 상관없다. 오늘은 다 상관없다.
현관문을 열기 전부터 군침 도는 라면 냄새가 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뱃속에서 사정없이 꼬르륵거리는 걸 더 이상 달랠 수가 없다. 당장 현관문을 열어 전부를 맞이한다. 전부가 테이블에 들고 온 커다란 쟁반을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여느 식당에서 주는 듯이 정갈하게 담긴 라면과 참기름을 발라 윤기가 좔좔 흐르는 김밥, 한눈에 봐도 맛깔나 보이는 김치에 사이다 한 병과 얼음을 담은 컵까지!
“맛있게 먹어요.”
요정펜션. 정말 여기 너무 좋다. 아직도 이곳에서 이틀밖에 보내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바로 다음날 다시 우울해졌다. 이곳에 온지 아직 사흘도 지나지 않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