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Written by. IN-AE

by 인내 INAE

비가 온다. 비가, 비가, 비, 비, 비가 온다.


후두둑, 툭툭, 솨아아아아-

톡톡, 또르르, 또르르, 툭툭.


비가 창문에 박혀 이슬처럼 맺히더니 맥없이, 그렇게 또르르. 그 한 방울 한 방울들이 모여 전역에, 비가 온다.


시선이 위로 올라간다. 시선이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한 발짝씩 나아간다. 왼쪽으로 돌아간다. 다시 앞으로, 앞으로. 시선이 멈췄다.


머리가 아프다. 어느새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이 누워있다.


다리에 아무 느낌이 없다. 그래서 다리가 움직이는 줄도 몰랐다. 그러니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러나 누군가 내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흔드는 것은 모를 수가 없다. 시선이, 아니 세상이 미쳐 흔들린다. 아찔해 눈을 꼬옥, 감았다.


"괜찮으세요? 정신 차리세요!"


괜찮냐면서 안 괜찮게 내 뺨을 때린다. 처음엔 토도독, 두드리더니 내가 계속 눈을 뜨지 않자 점점 세게, 반대쪽도 잊지 않고 점점 빠르게, 때리다가 재미라도 들렸는지 양쪽 볼을 동시에.


"아파."


비에 묻힐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속삭였는데 놓치지 않고 들은 사람은 아쉽게 때리는 손길을 거뒀다. 두 뺨이 얼얼하다. 왠지 심장박동이 두 뺨에서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친 사람은 되려 멋쩍었는지, 그동안 내 뺨을 때려댄 게 마음에 걸렸는지, 침을 꼴깍꼴깍 삼키다가 말했다.


"병원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119 불러드릴까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기다리던 말이었는지 말한 사람 뿌듯하게 냉큼 제 갈 길을 가신다. 대리석 바닥에 앉은 나, 홀로. 내 숨소리마저도 울려퍼지는 것만 같은 커다랗고 차가운 대리석 건물. 그 안에 홀로 남겨진 나, 홀로.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없다. 엉덩이 옆 바닥에 손을 짚었다.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이 도로 일어났다. 다시, 또 다시.


시선이 앞으로, 앞으로 나간다. 시선이 덜컹, 덜컹, 덜컹 내려간다. 귀로만 듣고 눈으로만 보던 비가 콧등에 떨어지더니 머리를 적시기 시작한다. 시선이 다시 덜컹 내려간다. 머리부터 차근차근, 비가 온몸을 적신다. 시선이 마지막으로 덜컹 내려갔다. 시선이 앞으로 나아간다. 입은 검은색 옷이 물을 먹어 더욱 어두워진다. 얼얼한 두 뺨보다도 무거워진다.


-솨,아,아,아,아,아,-----솨,아,아,아,아,아,----

-----솨,아,아,아,아,아,-----솨,아,아,아,아,아,

솨,아,아,아,아,아,-----솨,아,아,아,아,아,-----

---솨,아,아,아,아,아,-----솨,아,아,아,아,아,--

----솨,아,아,아,아,아,-----솨,아,아,아,아,아,-

--솨,아,아,아,아,아,-----솨,아,아,아,아,아,---


빗속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시선이 돌아 뒤로 향한다. 고개가 방금 내려온 계단 정상까지 들린다. 그 위에 네가 서 있다.


목소리가 들린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가 계단 위의 너를 따라 내려온다. 너는 내 바로 앞까지 내려왔다.


"왜 맞고만 있어?"

"아까 맞은 뺨? 아니면 비?"


내 도리은 질문에 바짝 다가온 너는 아무 말 없이 들고 있는 우산을 기울여 내 머리 위에 씌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비를 맞았다.


너의 우산을 뚫고 비는 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직선으로 쏟아져 내린다. 몸을 적신다. 몸이 젖는다. 너의 검은 우산이 머리 위에 드린 서늘한 그림자처럼 맞고 있는 비는 축축하고 습하다.


"감기 걸리면 어떡해."


너는 뽀송뽀송하다. 머리카락도, 속눈썹도, 피부도, 아주 뽀송뽀송하다. 내 머리는 반나절 불린 미역 같기만 하고, 속눈썹을 따라 떨어지는 빗방울이 뺨을 적셔 한창 목욕 중인 사람 같은데, 너는. 같은 우산 아래 너와 나는 이렇게 다르다. 꼭 딴 세상에 사는 사람이 만나선 안 될 만남을 이룬 것처럼. 그래서 나는 이 비를 네 대신 맞는다. 이 비는 내 세상의 비니까. 차마 널 안을 수가 없다.


너의 입이 움직인다.


"감기 걸리면 안 돼."

"왜 안 되는데?"

"아프면 안 돼."


지나치게 단호한 너의 말이 야속해 물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네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네가 한 발자국 멀어진다.


"내가 아프고 싶을 땐? 그때도 안 돼?"

"아프지 마."


네가 한 발자국 다가온다. 우산이 다시 머리 위를 가린다. 비는 여전히 내게 내린다. 내 세상의 비는 곧장 내게만 내린다.


"왜 난 아프면 안 돼?"

"네가 아플 몫까지 내가 가져갔으니까."

"넌 내가 아팠던 몫을 가져갔지."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난다. 네가 두 발자국 멀리 있다.


"난 지금이 제일 아파."


시선이 오른쪽으로 돌아 너를 시야에서 버린다. 뒤를 돌자 너와 나의 친구 둘이 비를 뚫고 내게 다가왔다. 한 사람의 품에 들린 하얀 항아리가 뽀송뽀송하다. 비에 젖지도 않았는데 매끈매끈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늘 차가울 것이다. 손이 빈 다른 한 사람이 내게 우산을 씌워준다. 비로소 내 세상에 비가 그친다.


뒤를 돌았다. 네가 없다. 내 세상에 비가 그쳤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네가 사라질 리가 없다. 여기 이렇게 버젓이 내 앞에 있는데, 없을 리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또 한 발자국 뒤로 물렀다. 우산 밖으로 나가자마자 비가 왔다. 비를 맞는다. 비를 맡는다. 머리칼을 따라 떨어진 빗방울이 이젠 얼얼하지 않은 뺨을 어루만지며 흘러내린다.


"너도 우산 써."

"데리고 가. 춥겠다."


내게 우산을 내미는 친구의 등을 떠밀었다. 너희들은 세네 번 나를 돌아보다 건물 안으로 너를 데리고 들어갔다. 시선이 백자를 따라간다. 또 다시 빗속에 남겨져 나, 홀로.


목소리가 들린다. 빗속에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비를 뚫고 귀에 꽂힌 목소리의 길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어느새 다시 나타난 네가 내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웠다. 우산을 뚫고 비는 더 젖을 틈도 없는 나를 계속 적신다. 너의 우산은 내게 쓸모가 없다.


비가 눈꺼풀 위로 떨어져 눈 안에 가득 찬다. 그러자 네가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내 뺨에 뻗는다. 그에 나는 다시 뒤로 물러났다.


"비 묻어. 난 괜찮아."

"울지 마."

"안 울어. 비야."

"울잖아."

"비라니까."

"울고 있잖아."

"우는 것도 맘대로 못해?"


네가 손을 떨군다. 그런 너의 손의 동선을 거슬로 올라가 너의 얼굴 위에 시선을 뒀다. 시선을 향해 손을 뻗는다. 젖은 내 손이 닿지 않게 거리를 두고 너를 감싼다. 너의 허공을 쓰다듬는다.


"난 이제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

"그래도 울지 마. 아프잖아."

"비라니까. 참 말 안 통해."


너의 입술이 다급히 오물거린다.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들리지는 않는다. 눈꺼풀에 빗물이 연속으로 떨어져 시야를 가린다. 뿌옇다 못해 하얗게 변한 시야가 답답해 눈을 연속으로 깜빡인다. 그 사이에 너는 사라졌다. 내가 아는 너는 이제 없다.


비가 온다. 하늘에서부터 뻗어나온 손길이 내게로 향한다. 비를 잡을 수 있다면 하늘까지 타고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길고 굵은 비가 내린다.


시선이 뒤로 향한다. 건물 안에 너희들이 보인다. 비를 피한 너희들은 건물 안에서 비를 내린다.


비가 온다. 비, 비, 비가 온다. 어디에나, 어디서나, 언제나 비가 온다.


그 어디에나, 어디서나, 언제나 너는 없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