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내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내 INAE Jun 01. 2019

쉬운 글을 쓸 필요가 있나? - #1

[사적인 리뷰] tvn '리틀빅히어로;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편

한국어는 조금 특별하다. '한글'이라는 문자 자체의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독창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어만이 가진 기가 막힌 표현력 때문이기도 하다.


'노랑'이란 색 하나를 설명하려 해도 '누렇다', '노랗다', '샛노랗다' 등이 있고, '누우우렇다', '노오오랗다'라고 한 글자를 길게 늘여 말을 하면 또 느낌이 다르다. 한국어엔 이 '느낌'이란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이 때문에 한국 작가들이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한다, 한국어만의 다양한 표현을 완벽히 번역할 외국어가 없기 때문이란 흔한 농담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는 이런 경우도 봤다. 평소 좋아하는 외국인 유튜브 채널이 있는데, 수려한 외모 덕분에 한국인 구독자가 유독 많기로 유명한 채널이었다. 한글을 모르는 채널 주인을 위해 잘하든 못하든 영어로 댓글을 남기는 구독자도 있지만 당당하게 한글로 번역 없이 댓글을 남기는 한국인 구독자도 꽤 많았다. 분명 채널 주인은 영어를 쓰고, 한글은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한국인들이 많은지 외국인 구독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외국인 구독자들은 한글로 쓰인 댓글에 찾아가 영어로 번역해달라는 뜻의 'translate'을 적어놓거나 외국인 채널에 왜 한글을 적느냐고 답글을 적었고, 심한 경우에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쓰기도 했다.


자극을 받은 한국인들 중에는 똑같이 심한 욕설을 퍼붓는 경우도 있었고, 자기들은 한국 가수들의 뮤직비디오에 영어나 모국어를 맘대로 사용하면서 우린 왜 안 되냐며 한글을 배워오거나 번역기라도 돌리는 성의를 보이라고도 말했다. 그런데 그중 눈에 띄는 괴상한 댓글이 있었다.


유독 한국인 구독자가 많은 외국인 유튜버 채널의 베스트 댓글. 너무 많은 한글 댓글에 대놓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는 일부 외국인 구독자들 보란듯이 괴상한 한글로 적혀있다.


뭔가 싶었던 댓글이었는데 찰나의 시간이 지나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한국인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할게요/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싫다고 XX하는데 꼴 보기 싫어요'란 말을 종성을 바꾸고 띄어쓰기를 무시한 채 올린 글이었다. 한국인 구독자들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외국인 구독자들이 번역기를 돌려도 알아볼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를 본 한국인 구독자들은 너도나도 댓글에 비슷한 형식의 댓글을 달아놓으며 '세종대왕 만세'를 외치기에 이르렀다. 한국인의 단합력을 다시 한번 실감한 순간이었다.


솔직히 기분 좋았다. 나는 이것이 한국어만의 자랑스러운 개성이라고 생각했다. 그 개성을 한껏 더 다채롭게 만들 수 있는 한글이, 한국인의 정신과 영혼 그 자체가 담긴 한글이 자랑스러웠다. 흔히 '국뽕이 차오른다'고 말하는 것처럼 다른 외국인은 이해할 수 없는 한국인만의 시그널이자 한국인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인 것 같아 좋았다.


누가 한국인만큼 한글을 잘 활용할 수 있겠는가? 누가 한국인만큼 한국어를 이해하고, 한국어에 담긴 사소해 보이면서도 깊은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 한국어를, 한글을 배울 수 있어서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간 것도, 나아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마저 자랑스러웠다.


TVN에서 방영된 '리틀빅히어로'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두둥)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대로 하기 전의 자기반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