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상처를 핥는 시간

by 박은호

밤 9시, 나는 구석진 자리를 찾아 내 상처를 핥는다.

아마 다들 비슷할 것이다.


이 시간이 되면 세상에 작은 틈이 생긴다.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는, 아주 조용하고 내밀한 틈.

세상은 늘 아침이 시작이라고 말하지만,

나의 진짜 하루는 소음이 잦아드는 밤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아침은 세상에 내어주는 시간이고,

밤은 겨우 남겨진 나를 되찾는 시간이다.


어제 아침 7시, 눈을 뜨기도 전부터 머릿속은 이미 시끄러웠다.

'그 메일 답장 보냈나?'

'오늘 할 일이 뭐였지?'

몸을 일으키기도 전인데 말이다.


밤 9시가 되자 모든 게 고요해졌다.

아이는 잠들었고 집 안은 적막하다.

소파에 앉아 습관처럼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멈췄다.

하루 중 처음으로, 누구도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순간이다.


아침은 일종의 비상 대기 상태다.

알람이 울리는 순간, 나는 이미 어딘가로 호출된 몸이다.

딱히 바쁜 일이 없어도 마음 한구석은 늘 팽팽하다.

세상이 내 마음의 경계를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밤은 다르다.

세상이 나를 잡아당기던 끈을 놓아준다.

드디어 비번인 셈이다.


사람들은 완벽한 아침 루틴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어떻게든 남들보다 앞서 하루를 '장악'하려고 몸부림친다.

하지만 정작 밤의 루틴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밤은 그저 쓰러져 잠들거나, 의미 없는 스크롤로 휘발시키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때 깨달았다. 루틴은 아침이 아니라, 사실 이 밤을 위해 짜야한다는 것을.


낮 시간은 세상에 내야 하는 세금 같은 것이지만,

밤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지불해야 하는 보상이다.

아침을 설계하는 것이 성공을 위한 기술이라면,

밤을 설계하는 것은 무너진 나를 복구하는 생존의 문제다.


오늘이 끝난 시간과 잠들기 전 사이의 짧은 틈새.

고작 한두 시간일 뿐이지만,

내가 온전히 나로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낮이 문명의 시간이라면,

밤은 다시 야생의 동물이 되어도 좋은 시간이다.

구석에 처박혀 조용히 상처를 핥고,

낮이라는 세계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숨을 쉰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나면, 신기하게도 다음 날 아침이 한결 가볍다.

밤새 나를 충분히 보살펴주었기에, 다시 세상으로 나갈 힘이 생기는 것이다.


나만의 구석진 자리를 지켜야 한다.

어차피 아침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다시 나를 찾아올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다 읽었는데 왜 아직도 남아 있는가 - 무라카미 하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