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가득했던 밤하늘
비 내리는 날이면 세상이 한 박자 느려지는 듯하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속삭임은 오래된 멜로디처럼 마음을 감싼다. 공기는 촉촉하게 젖어 있다. 공기 속에 퍼지는 커피 향은 단숨에 세상과 분리된 고요한 섬으로 데려가는 듯하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는 안식이다. 나에게 돌아오는 길이며 잊고 있던 평화다.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는 순간 차가웠던 손끝은 온기를 되찾는다.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고단함도 녹아내린다.
빗소리는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커피 향은 소리를 채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깊고 부드러운 향은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한다. 과거와 현재, 나만의 조용한 세계가 공존하게 만드는 매개체다. 그 순간은 잃어버린 꿈속을 걷는 듯한 감각이다.
커피 향을 맡으며 지난날의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유난히 비가 잦았던 대학 시절의 어느 오후, 작은 카페 창가에서 비를 바라보며 친구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녀의 손끝에는 언제나 커피 향이 묻어 있었다. 따뜻한 커피를 나누며 듣던 부드러운 목소리는 빗속의 우산처럼 나를 지켜주던 순간이었다.
비 오는 날의 커피 향은 사랑의 흔적이며 위로의 언어다. 세상은 분주하고 빗줄기는 끝없이 떨어지지만 커피 향 속에서 자신을 되찾는 듯하다. 커피는 말없이 내게 속삭인다.
"괜찮아. 이 순간만큼은 천천히 살아도 좋아."
밖은 사람들이 바삐 우산을 들고 오가고 자동차는 빗속을 가르며 흙탕물을 튀기고 있다. 모든 소음은 커피 향 속에서 부드럽게 희미해지는 듯하다. 잔잔히 흘러가는 음악처럼 커피 한 잔 속에서 작은 쉼표를 찾는다.
빗소리가 잦아들고 커피 잔은 비워지지만 여운은 오래도록 남는다. 비 오는 날의 커피 향은 나에게로 데려가는 다리다. 오늘의 빗소리는 내일이 되면 잊힐지 몰라도 커피 향이 남긴 따뜻함은 마음속에 오래 머물 것이다.
따뜻함 속에서 하루를 비로소 사랑하게 된다.
은파랑
그 밤, 하늘은 은빛 바다였다. 달은 고요히 떠올라 어둠을 밀어내고 세상을 부드러운 빛으로 감싸 안았다. 바람은 잔잔히 불어와 나뭇잎을 흔들며 달빛을 조각냈고 사이로 별빛은 점점이 흩어져 하늘을 수놓았다. 그곳에 서서 고요한 아름다움이 영원하길 바랐다.
달빛 아래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대지는 빛의 살결을 두르고 있었다. 길가의 작은 돌조차 신비로운 광채를 머금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은 도시도 자연의 품에 안긴 숲도 모두가 하나의 무대처럼 조화롭고 평화로웠다. 달은 빛으로 모든 것을 동등하게 사랑하고 있었다.
마음은 빛에 젖어들었다. 달빛은 아무 말 없이 어두운 구석까지 스며들어 아프고 날카로운 감정들조차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눈을 감았다. 은은한 빛이 내 안에서 새로운 얘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나간 시간들, 잊힌 기억들, 여전히 풀리지 않은 질문들이 달빛 속에서 춤추며 다가왔다. 어쩌면 그 순간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무언가를 용서했는지도 모른다.
달빛은 침묵 속에서 많은 것을 얘기한다. 그것은 나를 재촉하지 않고 내 안의 쉼을 기다려준다.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깨닫는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빛 속에서 새로운 얼굴을 찾는다는 것을
달빛이 가득했던 밤하늘은 삶의 본질을 일깨웠다. 아름다움은 멀리 있지 않으며 고요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그 밤 달빛에 기대어 조용히 서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다음에 어둠이 찾아와도 기억할 것이다. 달빛이 가득했던 밤하늘, 온화함과 평화로움을
그것은 영혼을 위로하고 나갈 힘을 주는 영원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