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견디는 문장들 #225
– 타인을 위해 만든 허상 속에서 나를 잃어가던 시간
어느 날 문득 숨이 턱 막혔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고 그중 대부분은 누가 시킨 것도 급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쳐 있었고 마음은 허전했다.
왜일까.
생각 끝에 떠오른 단어는 '의무감'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니 그것은 진짜 ‘의무’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가짜 의무감’이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가 되라고 배웠다.
“남에게 피해 주지 마라.”
“도움이 필요하면 먼저 나서야 한다.”
이 말들이 언제부턴가 ‘내가 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바뀌었다.
심리학자 앨리스 밀러는 아이가 사랑받기 위해 자기감정을 억누르고 부모의 기대에 맞춰 살아갈 때 ‘자기 배반’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가짜 의무감은 그때 자라난다.
사랑받기 위해, 미움받지 않기 위해,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는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을 만들어낸다.
'답장을 바로 해야 예의지.'
'다들 힘든데 내가 쉬면 안 돼.'
'이 정도는 도와줘야지 사람이지.'
이런 말들은 의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적 없다.
그저 ‘좋은 사람’이고 싶었을 뿐이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는 인간이 ‘소속’과 ‘존중’을 갈망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 ‘역할’을 스스로 부여한다.
‘그룹의 중심은 내가 되어야 해.’
‘나는 항상 응답하는 사람이야.’
‘도움 요청을 거절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지.’
이런 생각들이 쌓여 ‘해야만 하는 나’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것이 ‘의사소통’을 왜곡한다는 점이다. 가짜 의무감은 솔직한 말보다 침묵과 억지를 낳는다. 감당할 수 없음에도 도와주고 내키지 않음에도 함께하며 기꺼운 척 웃는다.
그러나 그 끝은 원망이거나 탈진이다.
상대는 내가 스스로 한 행동이니 고마워하지 않고
나는 ‘왜 나만 이렇게 하냐’며 속으로 분노한다.
사회학자 미셸 푸코는 권력은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내면화된 감시’로 작동한다고 말했다.
가짜 의무감은 감시의 산물이다.
회사에서, 가정에서, 친구 사이에서도
우리는 ‘기대되는 역할’을 스스로 감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사회는 책임감 있는 사람, 공감하는 사람, 배려 깊은 사람을 좋아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무너지기까지 방치한다.
‘사람 좋다’는 말 뒤에는
“그래서 좀 더 해줘”, “그건 네가 해야지”라는
보이지 않는 요구가 따라온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대를 스스로 떠안으며
가짜 의무감을 의무처럼 여기게 된다.
인지과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뇌는 불확실성과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반복한다고 했다.
'내가 이걸 해줘야 마음이 편하지.'
'나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하지만 이는 ‘마음의 평안’이 아니라
죄책감 회피를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가짜 의무감은 뇌 속의 ‘보상 회로’를 자극한다.
착한 행동을 하면 일시적으로 뿌듯하고
칭찬받으면 도파민이 분비된다.
하지만 반복되면 감정이 무뎌지고
도움은 ‘기대’가 되고
쉬고 싶은 마음은 ‘게으름’으로 해석된다.
결국 중독처럼 착한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자기 파괴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는 너’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만남이 이뤄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짜 의무감은 ‘진짜 만남’을 가로막는다.
타인을 위한 척하며, 실은 인정받기 위해 움직일 때
관계는 조건적이고 불안하다.
‘나는 너를 위해서 이걸 했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나를 사랑해 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타인은 신호를 감지하지 못하고
나는 점점 고립된다.
우리는 다시 나를 회복해야 한다.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싫다.”
“지금은 내가 먼저 필요하다.”
이런 말들을 연습해야 한다.
거절은 무례가 아니라 정직이다.
쉬는 것은 나태가 아니라 회복이다.
‘해야 한다’는 말에 질문하기
“왜 해야 하지?”
“누가 하라고 했지?”
“안 하면 정말 큰일이 날까?”
거절의 말 연습하기
“지금은 어려워요.”
“그 일은 제 책임이 아닙니다.”
감정에 이름 붙이기
“이건 억지로 하고 있어서 속상해.”
“이건 나를 위한 행동이 아니야.”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기
타인의 필요보다 나의 감정을 먼저 들여다보는 연습
가짜 의무감은 누군가의 부탁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언제나 내 안에서 자란다.
나는 타인을 위해 산다고 믿었지만
사실 거절이 두려워, 혼자 남겨질까 봐
불안해서, 사랑받고 싶어서 스스로 만든 틀이었다.
이제 그 틀에서 벗어나려 한다.
착한 사람이라는 명찰을 떼고
그 자리에 ‘진짜 나’를 붙여본다.
때로는 불편하고, 이기적이고, 모난 모습일지라도
그게 나라면 받아들이기로 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짜 의무감이 아닌 진짜 삶을 위해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