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다 818 공항의 사랑과 이별
영화 '터미널'
공항버스에 설렘을 싣고
공항에 가보지 못한 지 한참 되었습니다
공항에서의 설렘과 기다림은
인생에서의 설렘과 기다림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모두 인생 터미널에서
설렘을 안고 뭔가를 기다리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랑일 수도 있고
기다림의 끝이 씁쓸한 실망일 수도 있고
설렘으로 부풀어 오른 만큼
부질없이 꺼져버리는 순간 허무하고
더 아프고 더 많이 쓰라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주저앉지 않고
설렘과의 이별에도 지치지 않으며
끝까지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영화 '터미널'에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톰 행크스 배우의
절묘한 만남은 운명입니다
톰 행크스가 연기하는
진격의 순진남 빅터 나보스키와
캐서린 세타 존스가 연기하는
아름다운 승무원 아멜리아가
우연인 듯 만났다가 스치듯 이별하는 것도
공항이라는 장소가 지닌 운명이겠죠
수없이 만나고 무수히 이별하며
잠깐 동안이지만 사랑과 우정도 나누는
공항을 배경으로 순박하고 아름다운 기다림을
연기하는 빅터 나보스키 역의 톰 행크스는
신기한 매력을 가졌습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 생활에도 적응하더니
'터미널'에서 공항 생활에도 잘 적응합니다
동유럽의 조그만 나라 크로코지아에서 온
빅터는 뉴욕 입성의 설렘을 안고
JFK공항에 도착하지만
입국 심사대에서 일단정지를 당합니다
그의 나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일시적 유령 국가가 되어
뉴욕으로 갈 수도 없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신세가 된 거죠
67번 탑승구에서 살며
영어도 안 되는데 카트를 이용해서
동전을 모아 햄버거를 사 먹고
거스름돈은 기분 좋게 사양하며
입국심사대의 노란 선 밖에서 기다리다가
입국 거부를 당하는 게 일상인
빅터의 공항살이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프랭크 국장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의 안정과 질서를 찾아가는 모습이
짠하면서도 어찌나 대견한지요
엔리크와 굽타와 써먼과 친구가 되고
승무원 아멜리아와 썸도 타고
손재주로 일자리를 얻기도 하고
친구가 된 엔리크와 입국 심사관 토레스의
사랑을 이어주는 오작교 역할도 합니다
이민국으로 넘어가서 망명 신청을 하라는
프랭크의 잔꾀에도 넘어가지 않죠
전쟁 중인 크로코지아로 귀국하는데
두려움이 있다는 대답만 하면
바로 오늘 밤 당장 뉴욕으로 갈 수 있다는
프랭크의 달콤 제안에도 그의 대답은
한결같이 순박하고 진실합니다
귀신 드라큘라 늑대인간도 두렵지만
우리나라는 두렵지 않다는 그의 진정성에
남자들은 다 거짓말쟁이라고 푸념하는
아름다운 승무원 아멜리아의 마음도
슬며시 젖어들게 되죠
뉴욕 레스토랑 식사값 40달러를 모으기 위해
공항 안에서 일자리를 구하지만 쉽지 않고
우연히 벽 인테리어에 손을 댔다가
실력을 인정받아 일도 하게 되는 빅터가
굽타 할아버지의 의심을 풀기 위해
엑스레이 기계를 통과하는 모습에
웃다 보면 눈물도 한 방울 맺혀요
정말 웃픈 상황이니까요
나풀레옹을 좋아하는 아멜리아와
재치 있는 대화도 나누고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건 눈이 좀 나쁜 거라며 아멜리아를 위로하는 모습도 듬직합니다
하필 공항 운영 시찰단이 오는 날
의약품 반출 문제가 생기는데
통역해 줄 사람이 없자 통역을 맡게 된 빅터는
아버지에게 드릴 약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애원에
아버지와 염소의 발음이 비슷한 것과
동물용 약품은 허가서류가 필요하지 않은 것을
재치 있게 이용해서 도움을 주게 되고
굽타가 영웅담으로 각색해서 전하는 바람에
염소 사나이 빅터의 호감지수가 상승하는 대신
프랭크 국장에게는 빅터에게
인정과 연민을 배우라는 조언이 건네집니다
비행에서 돌아오는 아멜리아를 만나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새 옷도 준비하고
저녁 식사 초대 멘트도 연습하며
카드게임 멤버들이 공항 빈자리에 마련해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들만의 레스토랑에서
오붓한 저녁 식사 데이트도 가슴 찡한 장면입니다
크루아상 이야기 중 호출기가 울리자
39살이라는 나이를 고백하며
호텔을 전전하며 평생을 기다린다는 그녀에게
자신은 공항에서 기다리며 산다는
빅터의 따뜻한 위로가 건네지고
호출기를 던지고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이
짧지만 유쾌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토레스가 꽝 찍어주는 비자 거부 도장 위에
남자 친구가 기다린다고 빅터가 대신
전해 주는 반지 상자는 뜬금없지만
반지를 손에 끼고 웃으며
마침내 결혼하는 엔리크와 토레스 커플은
예쁘고 유쾌하고 사랑스러워요
그러나 빅터의 사랑은
안타깝게도 꽃봉오리에서 머무르죠
빅터가 꽃을 들고 기다리는 아멜리아는
프랭크 국장에게 불려 가고
빅터의 땅콩 깡통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모른다는 대답에 왜 하필 빅터냐고 묻자
당신 같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대답하는 멋진 아멜리아를 위해
빅터가 준비하는 벽면 분수대는
사랑꾼의 선물다운 완소 아이템입니다
9개월 동안 지연되는
공항살이를 지치지 않고 견디는 빅터가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준 일천 개의 분수 대신
벽면을 이용해서 만든 빛의 분수에서
물은 쏟아지지 않지만 그 자체로 감동이고
길고 긴 기다림의 이유인 땅콩 깡통을 보여주는
빅터의 사연은 가슴 뭉클합니다
땅콩 깡통이 돌아가신 아버지라며 뚜껑을 열자
오래전 헝가리 신문에 실린 57명의
재즈 레전드의 사진과 56명의 사인이 나오죠
영어를 모르는 아버지가 수녀님의 손을 빌려
수백 통의 편지를 쓰고 40년을 기다려
사인을 받았는데 1명이 빠졌답니다
색소폰 연주자 베니 골슨의 사인을 받아
깡통에 넣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빅터는 뉴욕행 비행기를 탄 거였어요
때마침 크로코지아 전쟁이 끝나고
염소 사나이 빅터를 위해 건배하고 축하하는데
1일 임시 비자를 받아다준 아멜리아는
함께 가자는 빅터의 말에 고개를 내저으며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선물로 건넨
사진을 넣은 목걸이 안에는
운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말로
작별의 인사를 대신합니다
1일 임시 비자이므로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프랭크 국장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뒤끝 끝판왕 프랭크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죠
써먼과 엔리크와 굽타를 추방하겠다고 하자
친구들을 위해 아버지와의 약속을 포기하고
집에 가겠다고 마음을 접는 빅터에게
왜 끝까지 안 싸우냐고 굽타가 나섭니다
고향 인도를 떠나와 23년째 돌아가지 못하는
굽타 할아버지가 빅터에게 겁쟁이라고 하죠
마지막 한 발자국 떼놓을 용기가 없냐며
크로코지아행 비행기 앞으로 돌진해서
'나는 집에 간다'라고 외치며
대걸레로 비행기를 막아서는 장면은
눈물 납니다
프랭크 국장의 사인을 받지 못한 채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뉴욕으로 가려는
빅터를 체포하는 대신 친구 써먼은
웃지도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문 보이죠? 저 문을 나가면 뉴욕입니다
돌아서요 지금 눈이 오니까 이게 필요해요
행운을 빌어요'
눈이 온다며 외투를 벗어 입혀주는
써먼 멋쟁이~
눈이 오는데 택시에 타려다 말고
아멜리아와 스치듯 눈인사를 나누고
마지막 한 장의 사인을 받기 위해
베니 골슨의 재즈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빅터의 표정과 사인을 받은 후의 표정에는
세상 모든 기쁨이 잔잔히 머무릅니다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기쁨은 더 크고 깊숙해서
한 방울의 소리까지도 아까울 정도입니다
택시를 타고 그는 말합니다
'나 이제 집에 가요'
집에 간다는 말까지도
가슴 뭉클한 영화 '터미널'
그렇죠
인생은 기다림입니다
지치지 않고 적응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
멋진 선물을 준비하고 저만치서 기다리는
인생이 바로 공항 터미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