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다 840 나무를 노래하다

영화 '레토'의 흑백 감성

by eunring

흑백영화가 주는 매력이 있다

부드러운 상상력의 깊이를 더해주는

묵직한 힘이 있고

고요 속의 외침과도 같은

절실함이 있다


무채색이 툭 던지는 감성과

차분한 매력 속으로 빠져드는

영화 '레토'는 뮤직 드라마 같다

전설의 러시아 록 밴드 키노의 리더인

자유로운 뮤지션 빅토르 최를 연기하는

유태오 배우의 눈빛이 순수해서 좋다


커피를 좋아해서 그런지

빅토르와 나타샤가 버스를 타고

커피를 배달하는 장면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열정적인 록스타 마이크가 좋아하는

더블샷 커피를 찻잔째 들고 가는 나타샤와

선물이 식는다며 식기 전에 빨리 가자고

우주선이라도 타야 하나 웃는 빅토르

그리고 버스에 탄 승객들이

함께 어우러져 노래하는 모습이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감성 충만하다


'나는야 승객이라네

차를 타고 달리네 도시의 뒤편을 지나

하늘에 고개를 내미는 별을 바라보네'

이기 팝의 '패신저(Passenger )'가

흘러나오기도 하는 깨알 재미도 있다


좋아하는 커피를 사 왔다며

맛이 어떠냐고 나탈리가 묻자

써~ 맛있고 그런데 식었다는 마이크의 말과

안타깝네~라는 나타샤의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난다


빅토르와 마이크와 나타샤의

솔직해서 위태로운 삼각구도가

식어버린 커피보다 더 안타깝기도 하다

빅토르와 키스하고 싶다는

나타샤의 말에 마이크가 묻는다

'축복해 줄까 허가서라도 써 줄까'라고 묻자

그냥 말로 해달라는 맥락 없는 장면에서도 마이크는 순하고 너그럽고 차분하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갈등 대신

선한 미소를 머금는 마이크의 마음을

살며시 어루만져 주고 싶다


프릴 달린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어깨를 내리 덮는 부드러운 머리를 찰랑찰랑

기타 치며 노래하는 빅토르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로큰롤 레코드를 사기 위해

영혼을 팔 수도 있다는 노래 가사가 왠지 짠하다

로큰롤 음악을 제대로 누릴 수 없었던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도 한 영화인데

사실 난 록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목공으로 일하는 노동자 빅토르

이제는 저 세상의 별이 된 빅토르 최의

데뷔 무대까지를 그려내는 영화 '레토'는

빅토르 최가 밴드 키노로 무대에 올라

'나무'를 노래하며 끝난다


멜랑꼴리한 멜로디에

담담하게 얹히는 노래 가사가

잔잔히 스며든다


'난 알아 내 나무는 일주일을 살지 못해

난 알아 내 나무는 이 도시에서 죽어가

하지만 난 내 모든 시간을 그와 함께 하지

다른 다 싫어

내겐 그가 내 집인 것 같아

내겐 그가 내 친구인 것 같아'


스물여덟 이른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빅토르 최의

짧고 강렬한 음악인생은 영화 제목처럼

여름(레토)이다


첫 부분과 끝 부분에

청춘들의 여름 바다가 나오는데

'나는 게으름뱅이~ 엄마 엄마~'

모닥불을 피우고

밤바다로 뛰어드는 청춘의 순간들이

가난하지만 자유롭고

어둠 속이라 더욱 눈부시다


저항과 자유 속에도 어김없이

사랑이 끼어들어 서로를 아프게 하고

비에 흠뻑 젖으며 공중전화 부스 곁에 서 있는

마이크의 외로운 모습과

주륵주르르 빗소리에 젖어드는 노래

루 리드의 Perfect Day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루 리드는 말했지

완벽한 하루는~

정말 완벽한 하루야~

같은 날 비에 젖어

완벽한 하루였다고 웃던 빅토르가

루 리드의 가사를 나타샤에게 돌려주고

키노 밴드의 공연에 마이크를 초대하는

마무리가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스럽다

사랑이란 때로

스쳐지나는 바람과도 같다


바보가 된 것 같다는 마이크에게

10대의 연애 같은 거라는 나타샤는

손 잡는 게 제일 위험하다는 마이크를

그가 좋아하는 커피로 달래며

세 사람의 삼각구도는

스르르 원위치


열망하는 음악이 있어 눈부시고

철부지 청춘이라 사랑스럽고

엇갈리는 사랑이 있어 안타까운

영화 '레토'는

무채색이라 더 아름답다


노래와 회상에 덧입혀지는 컬러

덧씌워지는 장난스러운 글자들과

애니메이션도 깨알 재미 톡톡 더해주고

난 나무를 심었다는 빅토르의 노래를

함께 듣는 마이크와 나타샤의 미소가

쓸쓸하면서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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