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다 885 88개의 건반으로

전하지 못한 마음

by eunring

'시네마 천국'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과

엔리오 모리꼬네 음악의 만남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언젠가 보았더라도 다시 보면

파도치는 감동의 물결에 젖어드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몇 번을 봤어도 좋고 몇 번을 더 봐도 좋을

슬프고도 아름다운 인생 영화입니다


전설의 피아니스트 그의 이름은

'대니 부드만 T.D.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

이름이 길어서 슬픈 운명일까요?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새해 첫날 태어난 그는

버지니아 호의 일등석 선실 피아노 위

레몬 상자 안에서 발견됩니다


석탄실에서 일하는 노동자

대니 부드만이 발견해서 몰래 키우게 되죠

화요일에 태어났으니 튜스데이라 부르라는

우스갯소리에 데니는 자신의 이름과

레몬 상자의 레몬 그리고 1900년을 이어

길고 재미난 이름을 지어줍니다


유럽과 아메리카를 오가는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자라고 창문으로 내다보며 살다가

배와 함께 사라진 전설의 피아니스트

'나인틴 헌드레드'

그에게는 자신만의 언어가 있고

자신만의 세계와 음악이 있어요


울렁이는 배를 요람 삼아

유년기를 배 안에서 숨어 지낸 그에게

'엄마'라는 단어는 경주마의 이름이었고

아이가 없는 어른은 고아원에 가야 한다는

배 안의 세상이 그의 전부이고

파도에 쉴 새 없이 울렁대는 버지니아 호가

그의 집이었으니까요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는 것은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죠

사람들의 얼굴과 생각 걸음걸이

눈빛과 표정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는

그는 천재 피아니스트입니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게 건반을 두드려 연주하고

뜨거워진 피아노 줄에 담뱃불을 붙여

재즈 창시자 젤리에게 건네는

피아노 배틀 장면도 멋지고 흥미롭지만

'빌어먹을 재즈'라고 그가 중얼거리듯

대결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그는 다만 피아노를 즐기는 사람이니까요


27세 되던 해 트럼펫 연주자 맥스를 만나

친구가 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폭풍우로 배가 쉴 새 없이 울렁거리고

맥스가 심한 뱃멀미에 시달릴 때

나인틴 헌드레드가 나타나서

피아노 고정장치를 풀고

마치 파도타기라도 하듯이

연회장을 이리저리 미끄러지듯 굴러다니며

'Magic Waltz'를 치는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납니다


뉴올리언스 출신인 맥스에게 들려주는

도시를 덮는 신비로운 안개 이야기는

배에서 한 번도 내린 적이 없는 그가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은 것을

여행이라도 한 듯 읊조리는 거죠

'네가 누구든 난 맥스 튜니'라며

덥석 손 내밀어 그와 친구가 되는

맥스는 친구로서의 슬픔도

함께 끌어안게 됩니다

친구니까요


배 안에서 음반 녹음을 하다가

창 밖의 소녀 퍼든을 보게 되는

아련하고 사랑스러운 장면도 기억에 남아요

동그란 창밖을 서성이는 몽환적인 퍼든

그녀의 눈빛과 표정과 서성거림을 바라보며

사랑의 떨림을 느끼는 그가 연주하던

'Playing Love'는 첫사랑의 설렘처럼

애틋하고 아름답습니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우산도 없이 흠뻑 젖은 그가

우산을 쓰고 바다를 바라보는 퍼든에게

머뭇머뭇 다가가지만

갑자기 모여드는 사람들 때문에

손에 든 작은 마음의 선물을 전하지 못합니다

세상 하나뿐인 음반을 건네려고

퍼든이 배에서 내릴 때 용기를 내 보지만

인파에 밀려 전하지 못하는

그의 사랑이 안타깝습니다


그가 딱 한 번 배에서 내리려 했던 적이 있어요

왜 육지에 가려는지 맥스가 묻자

바다를 보기 위해서라고 하죠

바다에서 바다를 보러 가느냐고 묻자

육지에서 보는 바다는 다르다고

작은 아코디언을 가진

팝스 아저씨의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 본 바다는 천둥소리를 내며

인생은 무한한 거라고 그가 말했다죠


그 아저씨가 바로 퍼든의 아버지였고

육지로 가서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바다의 소리를 들어보겠다며

마음을 작정한 그는 아마도

퍼든과 함께 하는 육지의 삶을

잠시 꿈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문득 멈춰 서고 맙니다

처음으로 배에서 육지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서 멈추어 거대한 도시를 바라보며

잔잔히 흔들리는 그의 눈빛과 표정과 미소도

파도소리의 먹먹함으로 남습니다


모자를 벗어던지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다가

다시 돌아서서 배로 돌아온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하죠

도시는 크고 멋지고 끝이 없었다고

본 것 때문이 아니라

보지 않은 것 때문에 돌아왔다고

자신의 집인 빅토리아호는

선수에서 선미까지 시작과 끝이 있고

피아노 건반은 88개 유한한데

세상이라는 건반은 무한해서

오직 신만이 연주할 수 있다고 합니다


수백수천 개의 길을 봤노라고

그 많은 길들 중에서

어떻게 단 하나의 길만을 선택할 수 있느냐고

세상은 자신에게 너무 큰 배라서

육지에서는 연주할 수 없다며

배에서 내리지 않겠다는 그의 선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은 내게는 너무 큰 배야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고

끝나지 않을 여행이며

지나치게 강렬한 향수이고

내가 결코 만들 수 없는 음악이야

그래서 배에서 내리지 못했던 거지

차라리 내 인생에서 내리는 거라면 몰라도'


미안하다고 용서하라고

감당하라며~ 그가 친구에게 건네는

작별인사는 뭉클합니다

생일도 국적도 가족도 없는 그는

결국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다름없다고 하지만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입니다

맥스에게는 가슴속 깊숙이

아픈 기억으로 남을 친구니까요


하늘나라에도 분명 피아노가 있을 거고

어디서든 피아노를 칠 수 있으면 행복한

피아니스트 '나인틴 헌드레드'

그는 천사들의 눈빛과 표정과 날갯짓을 보며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 있을 같아요


그의 음악은 자유롭게 나풀대는

천사의 날개옷을 닮았을 테니

천상의 아름다움으로

눈부시게 빛나며 날아오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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