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다 916 라면 후 커피 한 잔

선 인생라면 후 인생커피

by eunring

어릴 적에는 설날이 좋았어요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 입고

나붓이 세배하면 빳빳한 새 지폐로

세뱃돈도 듬뿍 받고요


어릴 적에는 설날이 좋았어요

하양 노랑 달걀 고명 곱게 얹힌 떡국 먹고

나이도 한 살 꿀떡 먹으니

곧 어른이 된다는 생각에

기쁘고 설레고 신이 났어요


어릴 적에도 명절날 친척들 모여

북적대다가 휑하니 사라지고 나면

배가 고픈 듯 가슴이 휑한 듯

텅 빈 집안이 쓸쓸하긴 했어요


뭔지 모를 애잔함이

작은 어깨를 살짝 눌러대면

짙푸른 슬픔 같은 게

싸아하니 밀려들곤 했었죠


어른들이 명절이 싫다고 하실 때

우르르 왔다가 서둘러 간 빈자리

썰물처럼 휑해서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어른이 되어보니 그 마음 알 것도 같아요


설날이 다가오면 나이도 덤으로 오고

아직 오지도 않은 빈자리 미리 휑하고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발걸음들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들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

가슴속에서 들락날락


그래서 어른들은 명절이 별로인 거죠

살아보니 씁쓸하고 돌아보면 애틋하고

지난 시간들은 얼룩덜룩 아픔으로 짓무르고

다가올 시간들도 그닥 기쁠 것 같지 않으니

나이 한 살 덤으로 먹는 인생살이에

떡국 한 그릇이 그리 반갑지는 않은 거죠


명절 기분 고단하고

인생살이 고달플 때는

선 라면 후 커피가 답이랍니다

채소 듬뿍 라면 한 그릇 후루룩

그리고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입맛도 개운해지고

기분도 말끔하게 정리되거든요


후루룩 면치기 하다 보면

인생 뭐 있나 싶고

씁쓸 커피 한 잔에 살며시 가라앉는

부질없는 울적함도 있으니까요


인생 뭐~

그냥 한 걸음 두 걸음

서두르지 않고 살아보는 거죠


살다 보면 잠시 기댈 언덕도 나오고

살다 보면 펑펑 울 수 있는 자리도 있고

살다 보면 반짝 웃을 만한 순간도 있으니

떡국 한 그릇도 라면 한 그릇도

묵직한 나이 한 살도

거저먹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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