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08 화해의 시간 속으로
영화 '마빈의 방'
오래전 본 영화를 다시 봅니다
따뜻하고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고
다이안 키튼과 메릴 스트립의
과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자매 연기에
닥터 월리 역 로버트 드니로의 차분한 연기와
꽃소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반항하는 눈빛을 보는 즐거움도 있어요
영화는 무수히 많은 약병들부터 보여줍니다
플로리다의 집에서 침대에 누워
약으로 지내는 아버지 마빈(험 크로닌)과
수술 후유증을 겪으며
TV 드라마 열혈 시청자로 지내는
철부지 고모 루스(그웬 버든)
두 환자를 사랑으로 보살피며 지내는
언니 베시(다이안 키튼)마저
백혈병에 걸리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베시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가족들의
골수 기증 가능 검사가 필요한
막막한 현실이죠
베시에게는 이십 년째 헤어져 지내는
여동생 리(메릴 스트립)와 두 조카가 있어요
행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엄격한 잔소리쟁이 엄마 리에 대한 불만과
어릴 적에 집 나간 아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엄마의 사진을 찢고 불태우다가
집까지 태우고 정신병원에서 치료 중이고
엄마 리와 동생 찰리는 수녀원에서
잠시 더부살이로 지내던 중
베스의 소식을 듣고 플로리다로 옵니다
언니를 만나기 전 화장실 거울 속에서
하이~인사 연습을 하는 리의 모습이
웃프고도 안쓰러워요
항암치료 때문에 가발을 쓴
언니 베시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지만
아버지 마빈은 리를 알아보지 못해요
행크와 찰리 손자들도 알아보지 못하죠
17년 만에 처음 만난
베시 이모와 조카 행크는
어색하지만 서서히 친해집니다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물음에
이미 다 컸다는 행크는
'그냥 잘해주는 사람은 없고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거'라며
이모를 위해 골수검사는 안 할 거라고
경계의 눈빛으로 날 선 말을 합니다
"어떤 결정을 하든 사랑한다'고 말하며
따사롭고 다정하게 다가서는 베시에게
행크와 친해지려고 애쓰는 건
시간 낭비라고 엄마 리는 말하죠
행크가 좋아하는 공구박스와 함께
사랑과 관심을 건네는 베시 이모에게
행크는 조금씩 마음을 열어갑니다
해변의 금지구역을 지나쳐
신나게 차를 운전하다가 파도에 흠뻑 젖으며
웃고 친해지는 이모 베시와 행크의 모습이
시원스레 보기 좋아요
리의 골수가 맞지 않자
행크와 찰리도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데
행크는 무서운 게 아니라 아직
결정을 안 했을 뿐이라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정신병원에서 주로 혼자 지내고
늘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다른 곳에 있는 상상을 한다는 행크가 안쓰러워요
함께 병원에 가 달라는 행크에게
이모 베스는 선뜻 그러겠다고 합니다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머리가 빠진
언니 베스의 가발을 손질해주는
리에게 베스가 말합니다
'서로 의견은 다르지만
사이좋게 지내자
우린 자매야'
베시와 리는 아버지가 쓰러지자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헤어진 사연이 있어요
베시는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집으로 오고
리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겠다며
자신의 계획을 위해 가족의 곁을 떠났던 거죠
이십 년 만에 털어놓는
베시의 지난 사랑 이야기가 먹먹합니다
'웃는 거랑 숨이 막히는 표정이 똑같아서
익사한 줄도 몰랐다'는
허망하게 죽어버린 남자 친구 이야기에
그땐 왜 말 안 했느냐고 리가 묻자
'그땐 우리가 안 친했으니까'라는
베시의 대답이 슬프고 아릿합니다
가깝고도 한없이 먼 사이가 가족이고
그러다가도 스스럼없이 다가설 수 있는
그런 사이가 가족인 거죠
베시의 가발을 손질해주는 리의
진심 어린 표정과 손길에는 사랑이 가득하고
유행 모드로 경쾌하게 달라진 가발에
활짝 웃는 가족들은
함께 디즈니랜드 나들이를 가는데요
리는 행크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아빠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행크에게 한 걸음 다가섭니다
아빠가 어린 행크를 때렸기 때문에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리는 행크에게 말합니다
'넌 내게 낚싯바늘로 가득한 단지 같은 존재야
하나만 꺼내려해도 송두리째 따라 나와서
그냥 포기하게 돼'
그런 게 바로 우리 일상이고
포기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디즈니랜드에서 갑자기 코피를 흘리고 기절한
베시는 잠시 후 깨어나 리에게 울며 말해요
'잠들면 다시 깨어나지 못할까 봐
잠드는 게 겁이 나고 두렵다'고 말하는
베스의 아픔이 안타깝고 눈물겨워요
행크는 베스 이모 곁에서 살고 싶지만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어 하는 엄마를 보고는
혼자 몰래 자동차를 타고 떠나며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메모를 남기지만
베시 이모에게 남긴 메모를
리는 보여주지 않고 구겨버립니다
골수는 모두 베스에게 맞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결과가 전해지고
약물치료를 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베시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라고 웃으며 말합니다
아버지와 고모를 모신 자신은 행운아라며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행운이라고
말하는 베시의 모습이 가슴 찡합니다
눈앞에 닥친 버거운 현실을 감당하기 두려워
이십 년 전 그랬듯이
짐을 챙겨 달아나려는 리 앞에
집 나갔던 행크가 다시 돌아오고
'차를 몰고 나갈 때는 미리 얘기하라며
안 그러면 걱정'한다는 엄마의 다정한 잔소리에
행크의 굳은 눈빛도 스르르 풀어지며
모자간 화해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제멋대로 엉킨 사연과 감정들이
실타래 풀리듯 가지런히 풀어졌으니
현실의 벽에 붙어 있는 문제들도
서서히 풀어지게 되리라는
희망의 빛이 보여요
자신의 얼굴과 꼭 닮은 엄마의 사진을 보다가
차분하게 아버지의 약을 챙기는 리
아버지와 거울로 빛 장난을 하는 베시
아이들처럼 웃는 아버지와 베시를 바라보는
리의 눈빛에 잔잔히 고이는 사랑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실마리가 되겠죠
그렇게 진정한 가족이 되어 나누는
사랑과 화해의 시간 속에서
아픈 고모의 철부지 대사로 영화는 끝나지만
그들의 사랑과 아픔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보여요? 아버지와 나
그리고 저기 리도 왔어요'
아버지와 거울로 희망의 빛 놀이를 하는
베시의 대사가 애틋하고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흐르는 노래가
잔잔히 밀려드는 잔물결처럼
애잔한 여운을 줍니다
'두 어린 자매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요
자매는 각자의 미래를 상상하죠
내가 널 선택하지 않았어
너도 날 선택하지 않았지
누가 우리를 가족이라고 말할까
난 네가 있는 집으로 갈 거야
너도 내가 있는 집으로 와
내 사랑이 너를 치유해 줄 거야
우린 해변에서 춤추는 두 딸이 될 거야'
좋은 영화는 다시 보아도
몇 번을 다시 봐도 여전히 감동을 줍니다
n차 관람 얼마든지 좋은 영화 덕분에
일요일 늦잠은 필수가 돼버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