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4 찻잔 속의 꽃향기
그래도 커피
커피를 마시다 말고
느닷없이 차살림을 챙겨봅니다
차를 좋아하시는 옆집 언니 덕분에
한때 차맛에 길들여져
이것저것 차살림을 장만하기도 했는데요
올망졸망 다기들은
수납장 속에서 겨울잠 중이고
언니의 선물인 나무쟁반 위에는
조르르 필기도구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대략 난감입니다
지난해 사둔 찻잎은
커피에 치여 침묵하다가
뜬금 손길에 배시시 웃고 있어요
오늘이 곡우(穀雨)랍니다
24절기 중 여섯 번째 절기인데
잠자는 곡식들을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흔들어 깨우는 봄비가 내리는 날이래요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들이
잠에서 깨어나 윤기 머금는다는 오늘
비 소식 대신 미세먼지 예보에
아침 쌀쌀 오후 포근이랍니다
차밭에서는 햇차 수확이 한창이라죠
찻잎의 이름은 따는 시기에 따라
다섯 가지로 불리는데
곡우 이전에 처음으로 따는 찻잎을
곡우 전차라고 해서
우전(雨前)차라 부른대요
우전은 이른 봄 가장 처음 나온
어린 찻잎이라 맛과 향이 뛰어나답니다
차를 끓이면 맑은 연둣빛으로 우러나
온화한 향과 부드러운 단맛이 감도는
첫물차이니 첫사랑처럼 풋풋한
설렘의 향기도 품고 있겠죠
감성 줄무늬 나무쟁반에 담긴
필기도구들을 잠시 밀어내고
반으로 접혀 있던 다포를 깔고
마시던 커피를 그대로 마십니다
눈부시게 해맑은 4월
오후의 차 한 잔은 녹차로 해야죠
좋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차 마시던
도란도란 향기로운 순간을 기억하며
찻잔의 꽃향기라도 머금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