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192 허무한 인생

영화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

by eunring

엠마 스톤이 좋아서

영국 시대극의 분위기가 괜찮아서

한여름으로 접어드는 날씨의 눅눅함을

우아하고 화려하고 풍성하면서도 웃픈

시대극의 치맛자락으로 덮어봅니다


18세기 영국 황실의 모습과

의상과 소품과 자연의 풍경이

감각적으로 아름답게 그려지고

앤 여왕 역의 올리비아 콜맨

애비게일 역의 엠마 스톤

사라 제닝스 역의 레이첼 와이즈

3인 3색의 저마다 다른 매력에 빠져듭니다


세 여배우의 연기가 진지하고 처절해서

그들을 둘러싼 권력과 탐욕과

사랑이라는 이름의 질투까지도

살며시 덮어 다독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사랑이니 욕망이니 하는 것들이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니까요


18세기 초 앤 여왕 시절

상처 깊은 여왕과 카리스마 뿜뿜 귀족부인과 신분상승을 위해 영혼까지 팔아넘길 수 있는

몰락한 귀족 출신 하녀가 함께 하는

기품 있는 막장 드라마입니다


당시의 영국이 처한 현실을 배경으로

실존인물인 애비게일과 사라가

앤 여왕의 마음을 차지하여

권력의 정점에 서기 위해 다투는 가운데

두 사람의 사랑과 질투와 경쟁을

여왕은 즐기는 듯하지만

모든 인생이 그렇듯

세 사람의 끝도

적막한 허무일 뿐이죠


절대권력을 가진 앤 여왕은

남편과 자녀들을 모두 잃은 상실감과

폭식으로 인한 통풍과 까칠한 성격으로 인해

히스테리와 변덕을 시도 때도 없이 부리면서

방 안에서 열일곱 마리의 토끼들을 키우며

외로움을 달랩니다


'열일곱 명의 내 아이가 죽었어

몇 명은 유산 몇 명은 사산

조금 살다가 죽은 애들도 있어

아이가 죽을 때마다 내 일부도 함께 죽었지'

앤 여왕의 무심한 중얼거림이

아프게 살갗을 찌르고 들어와요


상처 투성이 앤 여왕 곁에는

오랜 친구이며 충복인 사라 공작부인이 있죠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권력 실세 사라는

솔직한 직언과 거침없는 비판도 아끼지 않아요


외교 사절단과 만나기 위해

꽃단장을 하고 나서는 앤 여왕에게

화장한 모습이 오소리 같다며

거침없이 지적질하는 사라와 앤 여왕은

그만큼 친숙하고 친밀한 관계인 거죠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의 앤 여왕이

화장을 고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가다가

어린 시종에게 화풀이를 해 댑니다

'방금 날 쳐다봤지? 감히 어딜 봐? 눈 깔아'

히스테릭한 모습에 푸훗 웃음 터져요


사라 덕분에 사촌인 애비게일이

하녀로 궁에 들어옵니다

아버지의 도박빚 때문에 집안이 몰락했으나

다시 귀족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애비게일은 신분 상승을 위해 호시탐탐

앤 여왕에게 접근할 기회를 노리죠


진흙으로 가득한 욕조에서

독소가 빠지니 좋다는 애비게일의 말에

이대로 빠져서 죽으면 어떡하냐고

앤 여왕이 묻자

'핫초코라고 생각하세요'

애비게일의 대답이 명쾌합니다

'그럼 기분 좋게 죽을 수 있겠네'라며

웃는 앤 여왕은 사라와 애비게일

두 사람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은근히 둘의 경쟁을 즐기는 듯해요


미로와도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도덕한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애비게일은 공작부인 사라의 차에 독을 타고

말을 타고 가다가 떨어진 사라는

얼굴에 상처의 흔적을 매달게 되죠


평생 사라에게 의지하고 살아서

사라가 없으면 안 된다는 앤 여왕을 모시며

애비게일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앤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아요

'넌 아름다워 사랑스러워서 빛이 나'

애비게일과 귀족의 결혼을 허락하며

여왕 노릇이 가끔 재밌다는 앤 여왕은

밀당의 고수 같아요


얼굴을 꿰맨 사라가 다시 나타나

여왕에게 애비게일을 내보내라고 하지만

질투하느냐고 웃으며

앤 여왕의 밀당은 계속됩니다

예전 편지를 빌미로 여왕을 협박하는 사라와

여왕이 행복하면 된다는 애비게일 사이에서

앤 여왕의 마음은 애비게일에게 기울어요


열쇠 반납하고 궁을 떠나라는 여왕의 명령에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하는 사라는

가면 다시 안 온다고 하죠

'난 당신에게 거짓말을 안 해요

사랑하니까'

진심이 느껴지는 사라의 애원에도

'난 여왕으로서 의무가 있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며 앤 여왕은

사라의 권력을 거침없이 거두어들여요

사랑은 나눌 수 있어도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거니까요


사라가 떠난 자리를

마침내 애비게일이 차지하지만

여왕은 한없이 쓸쓸하고

아프고 외롭고 고독해 보입니다


여왕의 상처는 깊어요

괜찮은 듯하다가 다시 피가 나는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사라의 편지를 기다리며 상심한 여왕에게

친구이자 충복이라 쓴 사라의 쓴 편지는

애비게일 손에서 걸러져

벽난로에 던져집니다


장부 기록을 트집 삼아 애비게일은

사라가 빼돌린 돈 문제를 꺼내 들지만

여왕은 아닐 거라 단언하면서도

사라네 가문을 추방하라고 해요

기다리는 여왕의 답장 대신

추방 명령이 도착하는데

사라의 표정이 오히려 홀가분해 보입니다

추방이 아니라 해방이군요


이제 내 세상이라는 듯

여왕의 토끼를 지그시 눌러 밟는

애비게일을 우연히 보게 되는 앤 여왕은

다시 여왕의 고품격을 장착하고

애비게일의 거짓 진심을 지그시 눌러 밟죠


통풍으로 아픈 다리를 문지르라고

애비게일에게 명령하고

무어라 한 마디 건네려는 애비게일을

거침없이 냉정하게 짓누르죠

'내가 허락하면 말해'

애비게일의 무릎을 꿇리고는 어지럽다며 애비게일의 머리채를 와락 휘어잡아요

난 여왕 넌 하녀이니 까불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 소리 없이 강합니다


욕망을 싣고 달리던 마차에서

급 추락한 듯한 애비게일의 표정과

내 것은 내 것 네 몫은 네 몫이라고

말하는 듯한 여왕의 표정이

무표정한 듯 복잡 미묘하게 겹치고

두 여배우의 고급진 표정 연기가

숨 막힐 듯 소름이 돋아요


이긴 것 같으냐고 사라가 묻자

애비게일이 도도하게 대답을 날렸었죠

'당신은 곧 쫓겨날 거고

난 하녀가 주는 파인애플을 먹을 거예요'

그러나 그 욕망의 파인애플이

결코 행복의 파인애플이 아님을

애비게일이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내려다보는 앤 여왕의 타고난 엄근진과

절대권력 아래 납작 엎드린 애비게일

두 사람의 상반된 표정과

의미가 전혀 다른 침묵 위로

토끼들의 모습이 겹치는 엔딩이

적막하고 허무합니다


욕망의 끝은 파멸일

이긴 사람도 진 사람도 없는

허무 엔딩이

다만 씁쓸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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