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172 소녀들의 시간

영화 '워터 릴리스'

by eunring

산 아래 친구랑 함께 하던

지난 시간들 속의 우리를 얘기하다가

기억도 때로는 짐이 된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어요


뒤돌아 생각하면

얼마나 철없고 무모한 시절이었던가요

터무니없이 고집스럽던 시간들 속의 내가

문득 안타깝고 새삼 부끄러워질 때가 있어요


내가 했던 말들을 다시 주워 담고

행동들을 지우고 싶을 때도 있고

애써 모른척했던 아픔들이 되살아나

새삼스럽게 뾰족하니 아플 때도 있죠


이제 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그 시절의 나에게 고개 숙여

그 마음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깊이 사과하고 싶은 순간도 있어요


아프고 아쉽고 안타깝지만

그 시간들 속의 내가 있으니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철없고 고집스럽고 마냥 서툴던

무모한 그 시간들이 무수히 모이고 쌓여

뭇별들이 모여 밤하늘이 되듯이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는 거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정서가 다르고 분위기도 사뭇 다르지만

소녀들의 사랑과 우정이 눈에 들어옵니다

첫사랑의 고민과 아픔과 갈등과 상실감이

저마다 빛깔과 향기가 다르고

무게와 깊이가 서로 다른

세 소녀의 성장 드라마에

잠시 귀를 기울여보는 시간입니다


사랑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플로리안 역의 아델 에넬 참 예뻐요

우연히 싱크로나이즈 대회에서

플로리안을 보고 사랑에 눈뜬 소녀

마리 역의 폴린 아콰르도 사랑스럽고

사랑에 빠져들고 싶어 안달이 난

안나 역의 루이즈 블라쉬르도

엉뚱하지만 볼수록 매력적이죠


흔히들 '불초상'이라 부르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소녀시절이라고 해야 할까요

맛보기 예고편이라고 해야 할까요

셀린 시아마 감독의 말에 의하면

'워터 릴리스는

우리가 어떻게 사랑에 빠지든지를

이야기해 주는 영화'랍니다


플로리안과 마리 두 소녀가

나란히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나누는

대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죽음과 마주 선 사람들이 천정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했을까~


십 대 소녀들에게는 낯선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 같아요

뜻밖에 찾아온 사랑의 감정도

죽음만큼이나 낯설고

혼란스러운 것이니까요


싱크로나이즈드 선수

플로리안(아델 에넬)에게 마음을 빼앗긴

소녀 마리(폴린 아콰르)는

그녀만 눈에 들어와서

그녀만 바라보게 되죠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고

그녀를 자기만의 것으로 갖고 싶어합니다


마리의 친구 안나(루이즈 블라쉬르)는

수영부 남학생 프랑수아를 좋아하지만

프랑수아의 마음은 그녀의 것이 아니니 괴롭고

장난감을 모으기 위해 해피밀을 먹는 안나에게 어린아이처럼 굴지 말라는 마리가

'네가 너무 지겨워 그만 보자'라고

사랑과 우정 사이의 갈등을

느닷없이 드러내기도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요


세 소녀가 따로 또 함께 겪고 견디는

사랑과 우정 사이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감정들을 섬세하고 잔잔하게 그려내며

첫사랑에 눈을 떠가는 소녀들의

서툴고 어색한 들뜸과 낯선 슬픔과 혼란과

아픔과 분노와 무력감까지도

감성적이고 감각적으로 드러냅니다


마리의 곁에 누우며

"우리 꼭 함께 있자 마리

혼자 있으니 사고만 쳐'

엉뚱한 안나의 말이 웃프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마리의 모습도 애잔해요


함께 파티에 간 마리와 안나

혼자 춤추는 플로리안

수영장 물속으로 뛰어드는 마리와

뒤따라 함께 뛰어드는 안나

그렇게 소녀들은 저마다의 사랑과

청춘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소녀들이 겪고 견뎌내는

혼란과 아픔만큼 성장하고 성숙해가며

언젠가 돌아보며 빙긋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도 한때 소녀였으니까요

우리 모두 아픈 만큼 성숙해졌으니까요

문득 돌아보면 그 시절이 애틋하고

안타깝고 고맙고 사랑스러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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