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185 무심히 스치고 지나가는
영화 '애프터 웨딩 인 뉴욕'
감성이 빗물처럼 촉촉합니다
추억이 톡톡 빗방울 같아요
인연을 따라가는 운명의 발걸음이
또박또박 차분하고 멜랑꼴리합니다
이자벨(미셸 윌리엄스)의
무심한 듯 깊숙한 매력과
테레사(줄리안 무어)의
죽음을 앞둔 차분한 슬픔이
사랑과 죽음의 이중주 같아요
수잔 비에르 감독의 2006년 영화
'애프터 웨딩'을 리메이크한
'애프터 웨딩 인 뉴욕'은 제목처럼
결혼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가족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고
동시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앞둔 테레사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요
어린 쌍둥이 아들과 딸 그레이스(애비 퀸)와
예술가 남편 오스카(빌리 크루덥)를
두고 가야 하는 그녀에게는
달리 선택권이 없답니다
미디어그룹 대표로 성공한 그녀가
인도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이자벨에게
거액의 후원금을 제안하고 뉴욕으로 불러
딸 그레이스의 결혼식에 초대하는 것도
그녀 나름의 안타까운 속셈이 있어요
그레이스의 결혼식에서 이자벨은
20년 전의 아픈 기억과 만나게 됩니다
20년 전 헤어진 남자 친구 오스카가
입양 보내기로 했던 딸 그레이스를
입양 보내지 않고 키워 결혼시키는 자리니까요
함께 키울 형편이 못 되어
입양 보내기로 약속했고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는 이자벨을
딸 그레이스는 이해한다고 합니다
'좋은 일을 하면
자식을 버린 게 용서될 것 같죠'
싱글대디 오스카와 결혼해
그레이스와 쌍둥이 아들을 키운
테레사의 뾰족 가시 돋친 말에
신발을 벗어던지고 이자벨은 달아나지만
'그레이스와 오스카에게 당신이 필요해요
돈만 주려고 당신을 부른 게 아니에요
아들들은 8살이에요 도와줘요'
죽음 앞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한
테레사의 눈물이 애절합니다
딸 그레이스를 슬프게 하지 않으려고
아픈 걸 말하지 않았다는 테레사에게
그레이스는 엄마가 아픈 걸 알았다면
다른 일로 시간 낭비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죠
사랑한다고 말할 시간이 없다고
우는 그레이스를 끌어안고 다독이며
말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거 안다고
테레사는 말해요
그게 가족인 거죠
말하지 않아도 알지만
그래도 말해야 하는 것이
사랑인 거니까요
테레사의 다음 달 생일을 앞당겨
미리 축하하는 파티 자리에서
테레사가 웃으며 하는 말이 쓸쓸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지나가는 것인지
우리가 세상을 지나가는 것인지'
아직은 죽고 싶지 않다는
테레사의 눈물 같은 비가 내리고
보라 노랑붓꽃들이 비에 젖으며
테레사의 영혼과 작별하는
가족들의 모습에 이어
이자벨은 짐을 챙기러
인도로 돌아옵니다
고아 소년 제이가 보여주는 새둥지가
인도에 온 이자벨을 반기죠
엄마새가 아기새에게
벌레를 먹여주는 걸 봤다는 제이에게
함께 뉴욕으로 가서 살자고 하지만
친구들이 그리울 거라며
제이는 고개를 내저어요
그렇게 소년 제이도
이자벨의 곁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이윽히 바라보던 이자벨은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듯해요
'세상이 우리를 지나가는 것인지
우리가 세상을 지나가는 것인지'
그렇게 이자벨도 소년 제이의 곁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거죠
우리를 스쳐가는 세상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세상은
고인 물이 되어 머무르지 않으므로
무심한 듯 온갖 이야기들이 건네는
감성들로 충만합니다
걸음걸음 차가운 빗물 머금으며
무심히 스치고 지나가는 듯하다가도
살랑이는 바람이 어깨 다독이고
다정한 위로가 함께 하는 발자국마다
반짝이는 햇살도 잠시 잠깐
눈부심으로 머무르다
또다시 스쳐 지나가는
저마다의 인생이니까요